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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마하트마 간디 3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투옥 생활 중, 간디의 몸은 많이 쇠약해졌다. 그래서 결국 1925년 석방이 된다. 그가 감옥에 있던 몇 년간 그는 힌두와 무슬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감옥생활 막바지였던 1924년, 그는 21일간의 단식 대 장정에 들어갔었다. 그 이유는 바로, 북서부 경계의 군사지역이었던 코하트(Kohat) 지방에서 힌두와 무슬림간의 폭동사태가 일어났던 것. 그 엄청난 단식은 그가 했던 많은 공개 단식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1932년이 되면서, 그는 Epic Fast라고 불리는 죽음의 단식에 돌입한다. 단식의 목적은 바로 '건드릴 수 없는 계층(Untouchable)' 이라고 불리고 억압받던 인도의 최하위 계층에게 독립된 선거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당시 힌두 사회에는 엄격한 계층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의 발전을 막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최하위 계층의 지도자가 간디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섯던 것. (아마 간디가 정치적인 인기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간디가 진심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디가 한 번도 힌두와 무슬림이 인도 사회의 두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논쟁에 대해 수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론들은 간디의 머리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던 걱정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꿋꿋이 사회 재정비를 하기 위해 건설적인 사회 프로그램들을 시작하게 된다. 간디는 위생과 건강에서부터 교육, 노동에 이르기까지, 사회 제반에 대해 몇 가지 건설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설립한 한 신문사를 통해 거침없이 그 생각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만약 간디에 대해 아무도 인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도 신문업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갔다는 것이다.



1930년 초반이 되자, 다시 민족 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당시 민족 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하던 인도 국립 의회(Indian National Congress)는 완전한 독립(Pruna Swaraj)이 곧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선언이 발표되고 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영국의 불합리한 법에 맞서 저항 운동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3월 2일, 간디는 Lord Irwin(영국에서는 상원의원을 Lord라고 불렀음 - 번역자 주)이라고 불리는 Viceroy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지금까지 영국이 많이 물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는 앞으로도 여전히 소금법에 대해 강력하게 맞설 것이라고 말을 한다. (당시 소금법은 영국이 인도인들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법안으로서, 인도인들로 하여금 모든 소금을 영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쓸 것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 번역자 주). 그의 편지에 많은 인도인들은 조금은 당황스러운 기쁨을 표했다. 그리고 간디는 바로 그 편지의 내용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1930년 3월 12일 이른 아침, 간디와 그의 무리들은 Dandi 지방의 해안가로 향한다. 그리고 4월 5일날 그곳에 도착하였다.(그때 당시 간디와 많은 사람들은 직접 걸어서 그곳까지 갔다 - 번역자 주). 간디는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소금을 제조하는 법을 가르치며 한 뭉치의 소금을 집어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수천만, 수억명(당시 인도 인구는 3억)의 사람들이 이 소금법에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불복종 운동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간디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 체포가 되었고, 다른 수백명의 사람들도 같이 체포가 되고 감옥에 구금이 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곧 해결되기 시작한다. 바로 영국 상원 Irwin이 간디와의 대화를 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 런던에서 인도의 독립 문제를 놓고 원탁 회의가 열리게 된다. (아마 영국인들이 많이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결국 1931년 간디는 영국으로 향하고, 그를 존경하는 몇몇 유럽인들을 만나서 힘을 쏟았지만, 인도 독립 문제 협상은 쉽게 끝나지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돌아오는 간디, 오자마자 다시 체포가 된다.


(원문)

Owing to his poor health, Gandhi was released from prison in 1925. Over the following years, he worked hard to preserve Hindu-Muslim relations, and in 1924 he observed, from his prison cell, a 21-day fast when Hindu-Muslim riots broke out at Kohat, a military barracks on the Northwest Frontier. This was to be of his many major public fasts, and in 1932 he was to commence the so-called Epic Fast unto death, since he thought of "separate electorates" for the oppressed class of what were then called untouchables (or Harijans in Gandhi's vocabulary, and dalits in today's language) as a retrograde measure meant to produce permanent divisions within Hindu society. Gandhi earned the hostility of Ambedkar, the leader of the untouchables, but few doubted that Gandhi was genuinely interested in removing the serious disabilities from which they suffered, just as no one doubt that Gandhi never accepted the argument that Hindus and Muslims constituted two separate elements in Indian society. These were some of the concerns most prominent in Gandhi's mind, but he was also to initiate a constructive programme for social reform. Gandhi had ideas -- mostly sound -- on every subject, from hygiene and nutrition to education and labor, and he relentlessly pursued his ideas in one of the many newspapers which he founded. Indeed, were Gandhi known for nothing else in India, he would still be remembered as one of the principal figures in the history of Indian journalism.


In early 1930, as the nationalist movement was revived,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the preeminent body of nationalist opinion, declared that it would now be satisfied with nothing short of complete independence (purna swaraj). Once the clarion call had been issued, it was perforce necessary to launch a movement of resistance against British rule. On March 2, Gandhi addressed a letter to the Viceroy, Lord Irwin, informing him that unless Indian demands were met, he would be compelled to break the "salt laws". Predictably, his letter was received with bewildered amusement, and accordingly Gandhi set off, on the early morning of March 12, with a small group of followers towards Dandi on the sea. They arrived there on April 5th: Gandhi picked up a small lump of natural salt, and so gave the signal to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to similarly defy the law, since the British exercised a monopoly on the production and sale of salt.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civil disobedience movement: Gandhi himself was arrested, and thousands of others were also hauled into jail. It is to break this deadlock that Irwin agreed to hold talks with Gandhi, and subsequently the British agreed to hold a Round Table Conference in London to negotiate the possible terms of Indian independence. Gandhi went to London in 1931 and met some of his admirers in Europe, but the negotiations proved inconclusive. On his return to India, he was once again arrested.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2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3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4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5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독립적 선거권(유권), 후퇴시키다, 구성하다, 거침없이, 아주/바로(그거), 명쾌한 종소리/대선언, 부득이하게/필연적으로, 강제로~하다/~할 수 밖에 없다, 어리둥절하게, 덩어리/뭉치, 잡아끌어 넣다, 막다른 골목, 결론이 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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