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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인도에 오고 1년간 그는 한 번도 법정에서 승리한 적이 없는 무능력한 변호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다 압둘라(Dada Abdulla)라는 한 인도 상인으로부터 간디에게 법률 자문을 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것은 간디에게 매우 긴 시간동안 남아공에 거주할 것을 요구하는 의뢰였고, 간디는 20년동안 그 곳에 살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남아공에는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곳에 거주하던 인도인들은 상당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상태였다. 그들은 정치적 권리도 없었고, 백인들로부터 'Coolies'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간디는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당시 남아공에서 인도인 얼마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는, 다음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날 간디는 피터메리쯔버그에서 1등석 티켓을 타고 우아하게 앉아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승무원들이 몰아닥치면서 그는 하등칸으로 쫓겨나게 된다. (의역)
이 사건으로 인해, 드디어 간디는 정치적인 시각을 트이게 되고, 위대한 인도의 지도자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비폭력, 비저항주의'라는 뜻의 'Satyagraha'라는 개념을 주창하게 된다. 간디는 자기 자신을 Satya(진실), 그리고 오로지 Satya랑만 결합될 수 있는 Ahimsa(비폭력, 사랑), 마지막으로 Brahmacharya(신에 대한 강한 신념)에 대한 독실한 신자라고 줄곧 설명하곤 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이러한 Satyagrapha에 대해 연마하는 과정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추구한 목적은 '억압자와 억압받는자 모두 그들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과 '자유는 그것이 억압받지 않을 때 진정한 자유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남아공 거주 인도인들에게 인두세(人頭稅)를 매기고 있었고, 기독교 방식이 아닌 인도인의 결혼은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래서 간디는 그의 저서인 'Satyagrapha in South Africa'에서 인도인들이 그들의 억압받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1909년이 되던 어느 날, 간디는 다시 이 모든 여정을 뒤로 한 채 인도로 잠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Hind Swaraj or Indian Home Rule' 이라는 짧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 논문을 필두로 산업화와 근대화의 모든 측면에 대한 비평을 하기 시작한다.
간디는 1915년에 남아공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인도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1931년에 잠깐 유럽에 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인도 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아무도 간디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간디는 꿋꿋하게 그의 정치적 스승인 고크할레(Gokhale)의 조언을 받으며 공부를 했고, 그가 공부한 내용을 당시 인도의 상황에 적용하려 노력하였다.
그 후 간디는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지역 항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비하르(Bihar) 지방에서 있었던 Champaran 항쟁이다. 그것은 당시 비하르 인디고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강압적인 노동 환경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 아메다바드(Ahmedabad)의 직물 제조공장에서 노동자와 관리자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운동을 꼽을 수 있다.
이렇게 간디는 전국 방방곳곳의 지역 항쟁에 참여를 하면서,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이렇듯 민족주의 정치의 방향을 재빠르고 강력하게 지휘해 나가던 모습은, 그가 1919년, Rowlatt 법이라는 강압적인 법에 대항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리고 간디는 그 시점을 전후로 인도의 유명한 작가였던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로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 호칭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펀잡(Punjab) 지방에서 소동이 발생하게 되고, 이로인해 많은 비무장상태였던 인도인들이 잔인하게 대량학살된다. 이에 분노한 간디는 펀잡국회조사위원회(Punjab Congress Inquiry Committee)에 관한 보고서를 쓰게 된다.
그 후로 2년간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벌이게 된다. 비협조 운동이란 인도인들로 하여금 영국 법인과 관련된 모든 것에 협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영국인에게 빼앗긴 명예를 되찾고, 자기 의존(독립)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비협조 운동이 확산되면서 영국 정부가 거의 인도에서 무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비협조 운동은 1922년 2월, 작은 시장도시였던 차우리 차우라에서 많은 인도 경찰관들이 영국인들로부터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중단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간디는 바로 체포가 되었으며, 폭동 선동죄라는 죄명을 부여받고 6년간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6년 후 최종 재판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영국의 비합리적인 법에 대해 건방진 말투로 고발을 하였다.
(원문)
After one year of a none too successful law practice, Gandhi decided to accept an offer from an Indian businessman in South Africa, Dada Abdulla, to join him as a legal adviser. Unbeknown to him, this was to become an exceedingly lengthy stay, and altogether Gandhi was to stay in South Africa for over twenty years. The Indians who had been living in South Africa were without political rights, and were generally known by the derogatory name of 'coolies'. Gandhi himself came to an awareness of the frightening force and fury of European racism, and how far Indians were from being considered full human beings, when he when thrown out of a first-class railway compartment car,
though he held a first-class ticket, at Pietermaritzburg. From this political awakening Gandhi was to emerge as the leader of the Indian community, and it is in South Africa that he first coined the term satyagraha to signify his theory and practice of non-violent resistance. Gandhi was to describe himself preeminently as a votary or seeker of satya (truth), which could not be attained other than through ahimsa (non-violence, love) and brahmacharya (celibacy, striving towards God). Gandhi conceived of his own life as a series of experiments to forge the use of satyagraha in such a manner as to make the oppressor and the oppressed alike recognize their common bonding and humanity: as
he recognized, freedom is only freedom when it is indivisible. In his book Satyagraha in South Africa he was to detail the struggles of the Indians to claim their rights, and their resistance to oppressive legislation and executive measures, such as the imposition of a poll tax on them, or the declaration by the government that all non-Christian marriages were to be construed as invalid. In 1909, on a trip back to India, Gandhi authored a short treatise entitled Hind Swaraj or Indian Home Rule, where he all but initiated the critique, not only of industrial civilization, but of modernity in all its aspects.
Gandhi returned to India in early 1915, and was never to leave the country again except for a short trip that took him to Europe in 1931. Though he was not completely unknown in India, Gandhi followed the advice of his political mentor, Gokhale, and took it upon himself to acquire a familiarity with Indian conditions. He traveled widely for one year. Over the next few years, he was to become involved in numerous local struggles, such as at Champaran in Bihar, where workers on indigo plantations complained of oppressive working conditions, and at Ahmedabad, where a dispute had broken out between management and workers at textile mills. His interventions earned Gandhi a considerable reputation, and his rapid ascendancy to the helm of nationalist politics is signified by his leadership of the opposition to repressive legislation (known as the "Rowlatt Acts") in 1919. His saintliness was not uncommon, except in someone like him who immersed
himself in politics, and by this time he had earned from no less a person than Rabindranath Tagore, India's most well-known writer, the title of Mahatma, or 'Great Soul'. When 'disturbances' broke out in the Punjab, leading to the massacre of a large crowd of unarmed Indians at the Jallianwala Bagh in Amritsar and other atrocities, Gandhi wrote the report of the Punjab Congress Inquiry Committee. Over the next two years, Gandhi initiated the non-cooperation movement, which called upon Indians to withdraw from British institutions, to return honors conferred by the British, and to learn the art of
self-reliance; though the British administration was at places paralyzed, the movement was suspended in February 1922 when a score of Indian policemen were brutally killed by a large crowd at Chauri Chaura, a small market town in the United Provinces. Gandhi himself was arrested shortly thereafter, tried on charges of sedition, and sentenced to imprisonment for six years. At The Great Trial, as it is known to his biographers, Gandhi delivered a masterful indictment of British rule.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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