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몇년간, 간디는 인도사회 재건설 작업에 온 몸을 바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인도가 독립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아메다바드(Ahmedabad)에 있는 그의 집(Sabarmati Ashram)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소금의 행진(3부 참조)에서 맹세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에는 그는 그의 원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운 거처와 마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바로 인도에서 '죽음의 심장' 이라고 불리는 세가온(Segaon) 지역. 그곳에는 전기도 없었고 물도 없었다. 오로지 어둠과 죽음많이 있을 뿐이었다.
간디가 이곳에 마을을 짓기 시작하자, 많은 정치가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간디와 미래 인도의 독립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 많은 유명인사가 찾아오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마가렛 생거 여사(미국에 출산정책을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간디는 또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를 요구하는 곳곳마다 찾아갔다.
간디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와중에 북부 국경지역에 가서 그의 열정적인 제자였던 파싼(Pathan) - 국경의 간디라고 불리우는 사람 - 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간디와 의회의 수뇌부는 파씨즘과 영국의 제국주의를 격하게 비난하면서 중립을 선언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의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의회장이었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는 이러한 간디의 의견에 반대를 하였다. 그리고 보스는 영국의 몰락이 당시 인도의 기회라고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보스는 의회장 재선을 놓고 간디와 접전을 벌여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생각은 바로, 간디가 여전히 국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간디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협조를 얻지 않는 이상 국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결국 보스는 사임장을 제출하게 되고, 의회장직에서 사임하자 마자 일본과 독일 나치주의자들의 협조자를 구하러 도망을 갔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1942년이 되고, 간디는 영국 법으로부터의 마지막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8월의 크란티 마이단(Kranti Maidan) 선언이다. 여기서 간디는 매우 감동적인 연설과 함께 모든 인도인들에게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그가 한 말이 바로 "실천하지 않을거면 죽어라.(Do or Die)" 라는 만트라(힌두교의 진언)이다.
같은 시기 간디는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떠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간디를 다시 체포하게 되고, 이로인해 인도 국회는 다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간디는 이 때 체포가 되어서 세계 2차대전이 끝날 때 까지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몇 달 후, 간디와 카스투르바(Kasturba)는 푸네(Pune)에 있는 아가 칸 왕궁(Aga Khan's Palace)에 구금되게 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카스투르바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것은 간디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카스투르바가 죽기 바로 전, 그의 유능하고 충실했던 비서 마하데브 데자이(Mahadev Desai)도 죽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두 사람을 잃은 간디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무슬림 연맹이 창궐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무슬림 일부 이익단체가 만든 것이었는데, 매우 영국에 협조적인 단체였으며, 심지어 그들의 전쟁을 돕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영국에 정권이 바뀌고 인도 독립에 긍정적이었던 Clement Atlee 휘하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독립은 급속하게 진행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진지한 협상도 같이 진행이 된다. 여기서 간디는 인도의 정치인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래서 그 협상들에 최대한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인도의 분할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였다.(당시 영국이 내세운 조건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할독립한다는 것이다. vivisection은 생체 해부를 뜻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묘사한 말 같다 - 번역자 주).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간디의 마지막 생애는 존경을 한다.).
또한 간디는 폭동으로 산산조각이 난 노아크할리(Noakhali) 지방의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들과 과부들을 돌봤다. 노아크할리 폭동이란 비하르에서 있었던 힌두교도들의 무슬림교도 살인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났던 무슬림교도들의 폭동을 말한다. 그리고 캘커타(Calcutta)지방에 가서 힌두와 무슬림의 국경분쟁을 조정하기 시작한다. 그의 노력으로 캘커타에서 일어나던 잔인한 전쟁은 막이 내리게 되고, 그 어떤 사람들도 간디의 이러한 '캘커타의 기적(Miracle of Calcutta)' 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드디어 독립을 한다. 그리고 간디는 그 때부터 네루(Nehru)지방에만 머물러 살았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를 인도 독립의 건설자이자 인도의 아버지라고 칭송하였다.
(원문)
For the next few years, Gandhi would be engaged mainly in the constructive reform of Indian society. He had vowed upon undertaking the salt march that he would not return to Sabarmati Ashram in Ahmedabad, where he had made his home, if India did not attain its independence, and in the mid-1930s he established himself in a remote village, in the dead center of India, by the name of Segaon [known as Sevagram]. It is to this obscure village, which was without electricity or running water, that India's political leaders made their way to engage in discussions with Gandhi about the futur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it is here that he received visitors such as Margaret Sanger, the well-known American proponent of birth-control. Gandhi also continued to travel throughout the country, taking him wherever his services were required.
One such visit was to the Northwest Frontier, where he had in the imposing Pathan, Khan Abdul Ghaffar Khan (known by the endearing term of "Frontier Gandhi", and at other times as Badshah [King] Khan), a fervent disciple. At the outset of World War II, Gandhi and the Congress leadership assumed a position of neutrality: while clearly critical of fascism, they could not find it in themselves to support British imperialism. Gandhi was opposed by Subhas Chandra Bose, who had served as President of the Congress, and who took to the view that Britain's moment of weakness was India's moment of opportunity. When Bose ran for President of the Congress against Gandhi's wishes and triumphed against Gandhi's own candidate, he found that Gandhi still exercised influence over the Congress Working Committee, and that it was near impossible to run the Congress if the cooperation of Gandhi and his followers could not be procured. Bose tendered his resignation, and shortly thereafter was to make a dramatic escape from India to find support among the Japanese and the Nazis for his plans to liberate India.
In 1942, Gandhi issued the last call for independence from British rule. On the grounds of what is now known as August Kranti Maidan, he delivered a stirring speech, asking every Indian to lay down their life, if necessary, in the cause of freedom. He gave them this mantra: "Do or Die"; at the same time, he asked the British to 'Quit India'. The response of the British government was to place Gandhi under arrest, and virtually the entire Congress leadership was to find itself behind bars, not to be released until after the conclusion of the war.
A few months after Gandhi and Kasturba had been placed in confinement in the Aga Khan's Palace in Pune, Kasturba passed away: this was a terrible blow to Gandhi, following closely on the heels of the death of his private secretary of many years, the gifted Mahadev Desai. In the period from 1942 to 1945, the Muslim League, which represented the interest of certain Muslims and by now advocated the creation of a separate homeland for Muslims, increasingly gained the attention of the British, and supported them in their war effort. The new government that came to power in Britain under Clement Atlee was committed to the independence of India, and negotiations for India's future began in earnest. Sensing that the political leaders were now craving for power, Gandhi largely distanced himself from the negotiations. He declared his opposition to the vivisection of India. It is generally conceded, even by his detractors, that the last years of his life were in some respects his finest. He walked from village to village in riot-torn Noakhali, where Hindus were being killed in retaliation for the killing of Muslims in Bihar, and nursed the wounded and consoled the widowed; and in Calcutta he came to constitute, in the famous words of the last viceroy, Mountbatten, a "one-man boundary force" between Hindus and Muslims. The ferocious fighting in Calcutta came to a halt, almost entirely on account of Gandhi's efforts, and even his critics were wont to speak of the Gandhi's 'miracle of Calcutta'. When the moment of freedom came, on 15 August 1947, Gandhi was nowhere to be seen in the capital, though Nehru and the entire Constituent Assembly were to salute him as the architect of Indian independence, as the 'father of the nation'.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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