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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31일 토요일

마하트마 간디 4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그 후로 몇년간, 간디는 인도사회 재건설 작업에 온 몸을 바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인도가 독립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아메다바드(Ahmedabad)에 있는 그의 집(Sabarmati Ashram)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소금의 행진(3부 참조)에서 맹세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에는 그는 그의 원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운 거처와 마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바로 인도에서 '죽음의 심장' 이라고 불리는 세가온(Segaon) 지역. 그곳에는 전기도 없었고 물도 없었다. 오로지 어둠과 죽음많이 있을 뿐이었다.

간디가 이곳에 마을을 짓기 시작하자, 많은 정치가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간디와 미래 인도의 독립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 많은 유명인사가 찾아오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마가렛 생거 여사(미국에 출산정책을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간디는 또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를 요구하는 곳곳마다 찾아갔다.



간디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와중에 북부 국경지역에 가서 그의 열정적인 제자였던 파싼(Pathan) - 국경의 간디라고 불리우는 사람 - 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간디와 의회의 수뇌부는 파씨즘과 영국의 제국주의를 격하게 비난하면서 중립을 선언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의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의회장이었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는 이러한 간디의 의견에 반대를 하였다. 그리고 보스는 영국의 몰락이 당시 인도의 기회라고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보스는 의회장 재선을 놓고 간디와 접전을 벌여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생각은 바로, 간디가 여전히 국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간디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협조를 얻지 않는 이상 국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결국 보스는 사임장을 제출하게 되고, 의회장직에서 사임하자 마자 일본과 독일 나치주의자들의 협조자를 구하러 도망을 갔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1942년이 되고, 간디는 영국 법으로부터의 마지막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8월의 크란티 마이단(Kranti Maidan) 선언이다. 여기서 간디는 매우 감동적인 연설과 함께 모든 인도인들에게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그가 한 말이 바로 "실천하지 않을거면 죽어라.(Do or Die)" 라는 만트라(힌두교의 진언)이다.

같은 시기 간디는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떠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간디를 다시 체포하게 되고, 이로인해 인도 국회는 다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간디는 이 때 체포가 되어서 세계 2차대전이 끝날 때 까지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몇 달 후, 간디와 카스투르바(Kasturba)는 푸네(Pune)에 있는 아가 칸 왕궁(Aga Khan's Palace)에 구금되게 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카스투르바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것은 간디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카스투르바가 죽기 바로 전, 그의 유능하고 충실했던 비서 마하데브 데자이(Mahadev Desai)도 죽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두 사람을 잃은 간디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무슬림 연맹이 창궐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무슬림 일부 이익단체가 만든 것이었는데, 매우 영국에 협조적인 단체였으며, 심지어 그들의 전쟁을 돕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영국에 정권이 바뀌고 인도 독립에 긍정적이었던 Clement Atlee 휘하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독립은 급속하게 진행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진지한 협상도 같이 진행이 된다. 여기서 간디는 인도의 정치인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래서 그 협상들에 최대한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인도의 분할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였다.(당시 영국이 내세운 조건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할독립한다는 것이다. vivisection은 생체 해부를 뜻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묘사한 말 같다 - 번역자 주).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간디의 마지막 생애는 존경을 한다.).

또한 간디는 폭동으로 산산조각이 난 노아크할리(Noakhali) 지방의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들과 과부들을 돌봤다. 노아크할리 폭동이란 비하르에서 있었던 힌두교도들의 무슬림교도 살인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났던 무슬림교도들의 폭동을 말한다. 그리고 캘커타(Calcutta)지방에 가서 힌두와 무슬림의 국경분쟁을 조정하기 시작한다. 그의 노력으로 캘커타에서 일어나던 잔인한 전쟁은 막이 내리게 되고, 그 어떤 사람들도 간디의 이러한 '캘커타의 기적(Miracle of Calcutta)' 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드디어 독립을 한다. 그리고 간디는 그 때부터 네루(Nehru)지방에만 머물러 살았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를 인도 독립의 건설자이자 인도의 아버지라고 칭송하였다.


(원문)


For the next few years, Gandhi would be engaged mainly in the constructive reform of Indian society. He had vowed upon undertaking the salt march that he would not return to Sabarmati Ashram in Ahmedabad, where he had made his home, if India did not attain its independence, and in the mid-1930s he established himself in a remote village, in the dead center of India, by the name of Segaon [known as Sevagram]. It is to this obscure village, which was without electricity or running water, that India's political leaders made their way to engage in discussions with Gandhi about the futur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it is here that he received visitors such as Margaret Sanger, the well-known American proponent of birth-control. Gandhi also continued to travel throughout the country, taking him wherever his services were required.


One such visit was to the Northwest Frontier, where he had in the imposing Pathan, Khan Abdul Ghaffar Khan (known by the endearing term of "Frontier Gandhi", and at other times as Badshah [King] Khan), a fervent disciple. At the outset of World War II, Gandhi and the Congress leadership assumed a position of neutrality: while clearly critical of fascism, they could not find it in themselves to support British imperialism. Gandhi was opposed by Subhas Chandra Bose, who had served as President of the Congress, and who took to the view that Britain's moment of weakness was India's moment of opportunity. When Bose ran for President of the Congress against Gandhi's wishes and triumphed against Gandhi's own candidate, he found that Gandhi still exercised influence over the Congress Working Committee, and that it was near impossible to run the Congress if the cooperation of Gandhi and his followers could not be procured. Bose tendered his resignation, and shortly thereafter was to make a dramatic escape from India to find support among the Japanese and the Nazis for his plans to liberate India.


In 1942, Gandhi issued the last call for independence from British rule. On the grounds of what is now known as August Kranti Maidan, he delivered a stirring speech, asking every Indian to lay down their life, if necessary, in the cause of freedom. He gave them this mantra: "Do or Die"; at the same time, he asked the British to 'Quit India'. The response of the British government was to place Gandhi under arrest, and virtually the entire Congress leadership was to find itself behind bars, not to be released until after the conclusion of the war.


A few months after Gandhi and Kasturba had been placed in confinement in the Aga Khan's Palace in Pune, Kasturba passed away: this was a terrible blow to Gandhi, following closely on the heels of the death of his private secretary of many years, the gifted Mahadev Desai. In the period from 1942 to 1945, the Muslim League, which represented the interest of certain Muslims and by now advocated the creation of a separate homeland for Muslims, increasingly gained the attention of the British, and supported them in their war effort. The new government that came to power in Britain under Clement Atlee was committed to the independence of India, and negotiations for India's future began in earnest. Sensing that the political leaders were now craving for power, Gandhi largely distanced himself from the negotiations. He declared his opposition to the vivisection of India. It is generally conceded, even by his detractors, that the last years of his life were in some respects his finest. He walked from village to village in riot-torn Noakhali, where Hindus were being killed in retaliation for the killing of Muslims in Bihar, and nursed the wounded and consoled the widowed; and in Calcutta he came to constitute, in the famous words of the last viceroy, Mountbatten, a "one-man boundary force" between Hindus and Muslims. The ferocious fighting in Calcutta came to a halt, almost entirely on account of Gandhi's efforts, and even his critics were wont to speak of the Gandhi's 'miracle of Calcutta'. When the moment of freedom came, on 15 August 1947, Gandhi was nowhere to be seen in the capital, though Nehru and the entire Constituent Assembly were to salute him as the architect of Indian independence, as the 'father of the nation'.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2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3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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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애써)나아가다, 제안자, 열정적인, 시작/발발, 제국주의, 획득하다, 부드럽게하다/제출하다, 목숨을버리다, 구금, 죽다, ~에 바로 이어(following),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매우 진지하게, 갈망하다, 생체해부, 인정되다, 비방자, 훌륭함, 제국, 단독적인, 잔인한, ~로 인해

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마하트마 간디 3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투옥 생활 중, 간디의 몸은 많이 쇠약해졌다. 그래서 결국 1925년 석방이 된다. 그가 감옥에 있던 몇 년간 그는 힌두와 무슬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감옥생활 막바지였던 1924년, 그는 21일간의 단식 대 장정에 들어갔었다. 그 이유는 바로, 북서부 경계의 군사지역이었던 코하트(Kohat) 지방에서 힌두와 무슬림간의 폭동사태가 일어났던 것. 그 엄청난 단식은 그가 했던 많은 공개 단식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1932년이 되면서, 그는 Epic Fast라고 불리는 죽음의 단식에 돌입한다. 단식의 목적은 바로 '건드릴 수 없는 계층(Untouchable)' 이라고 불리고 억압받던 인도의 최하위 계층에게 독립된 선거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당시 힌두 사회에는 엄격한 계층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의 발전을 막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최하위 계층의 지도자가 간디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섯던 것. (아마 간디가 정치적인 인기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간디가 진심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디가 한 번도 힌두와 무슬림이 인도 사회의 두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논쟁에 대해 수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론들은 간디의 머리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던 걱정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꿋꿋이 사회 재정비를 하기 위해 건설적인 사회 프로그램들을 시작하게 된다. 간디는 위생과 건강에서부터 교육, 노동에 이르기까지, 사회 제반에 대해 몇 가지 건설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설립한 한 신문사를 통해 거침없이 그 생각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만약 간디에 대해 아무도 인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도 신문업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갔다는 것이다.



1930년 초반이 되자, 다시 민족 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당시 민족 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하던 인도 국립 의회(Indian National Congress)는 완전한 독립(Pruna Swaraj)이 곧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선언이 발표되고 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영국의 불합리한 법에 맞서 저항 운동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3월 2일, 간디는 Lord Irwin(영국에서는 상원의원을 Lord라고 불렀음 - 번역자 주)이라고 불리는 Viceroy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지금까지 영국이 많이 물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는 앞으로도 여전히 소금법에 대해 강력하게 맞설 것이라고 말을 한다. (당시 소금법은 영국이 인도인들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법안으로서, 인도인들로 하여금 모든 소금을 영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쓸 것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 번역자 주). 그의 편지에 많은 인도인들은 조금은 당황스러운 기쁨을 표했다. 그리고 간디는 바로 그 편지의 내용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1930년 3월 12일 이른 아침, 간디와 그의 무리들은 Dandi 지방의 해안가로 향한다. 그리고 4월 5일날 그곳에 도착하였다.(그때 당시 간디와 많은 사람들은 직접 걸어서 그곳까지 갔다 - 번역자 주). 간디는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소금을 제조하는 법을 가르치며 한 뭉치의 소금을 집어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수천만, 수억명(당시 인도 인구는 3억)의 사람들이 이 소금법에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불복종 운동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간디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 체포가 되었고, 다른 수백명의 사람들도 같이 체포가 되고 감옥에 구금이 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곧 해결되기 시작한다. 바로 영국 상원 Irwin이 간디와의 대화를 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 런던에서 인도의 독립 문제를 놓고 원탁 회의가 열리게 된다. (아마 영국인들이 많이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결국 1931년 간디는 영국으로 향하고, 그를 존경하는 몇몇 유럽인들을 만나서 힘을 쏟았지만, 인도 독립 문제 협상은 쉽게 끝나지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돌아오는 간디, 오자마자 다시 체포가 된다.


(원문)

Owing to his poor health, Gandhi was released from prison in 1925. Over the following years, he worked hard to preserve Hindu-Muslim relations, and in 1924 he observed, from his prison cell, a 21-day fast when Hindu-Muslim riots broke out at Kohat, a military barracks on the Northwest Frontier. This was to be of his many major public fasts, and in 1932 he was to commence the so-called Epic Fast unto death, since he thought of "separate electorates" for the oppressed class of what were then called untouchables (or Harijans in Gandhi's vocabulary, and dalits in today's language) as a retrograde measure meant to produce permanent divisions within Hindu society. Gandhi earned the hostility of Ambedkar, the leader of the untouchables, but few doubted that Gandhi was genuinely interested in removing the serious disabilities from which they suffered, just as no one doubt that Gandhi never accepted the argument that Hindus and Muslims constituted two separate elements in Indian society. These were some of the concerns most prominent in Gandhi's mind, but he was also to initiate a constructive programme for social reform. Gandhi had ideas -- mostly sound -- on every subject, from hygiene and nutrition to education and labor, and he relentlessly pursued his ideas in one of the many newspapers which he founded. Indeed, were Gandhi known for nothing else in India, he would still be remembered as one of the principal figures in the history of Indian journalism.


In early 1930, as the nationalist movement was revived,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the preeminent body of nationalist opinion, declared that it would now be satisfied with nothing short of complete independence (purna swaraj). Once the clarion call had been issued, it was perforce necessary to launch a movement of resistance against British rule. On March 2, Gandhi addressed a letter to the Viceroy, Lord Irwin, informing him that unless Indian demands were met, he would be compelled to break the "salt laws". Predictably, his letter was received with bewildered amusement, and accordingly Gandhi set off, on the early morning of March 12, with a small group of followers towards Dandi on the sea. They arrived there on April 5th: Gandhi picked up a small lump of natural salt, and so gave the signal to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to similarly defy the law, since the British exercised a monopoly on the production and sale of salt.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civil disobedience movement: Gandhi himself was arrested, and thousands of others were also hauled into jail. It is to break this deadlock that Irwin agreed to hold talks with Gandhi, and subsequently the British agreed to hold a Round Table Conference in London to negotiate the possible terms of Indian independence. Gandhi went to London in 1931 and met some of his admirers in Europe, but the negotiations proved inconclusive. On his return to India, he was once again arrested.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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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선거권(유권), 후퇴시키다, 구성하다, 거침없이, 아주/바로(그거), 명쾌한 종소리/대선언, 부득이하게/필연적으로, 강제로~하다/~할 수 밖에 없다, 어리둥절하게, 덩어리/뭉치, 잡아끌어 넣다, 막다른 골목, 결론이 나지 않는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주가 책정 원리를 알아보자

주가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떠한 기준으로 살펴봐야 하는가.

주가란 기본적으로 PER(Price Earning Ratio)를 기준으로 살펴봐야 하며

다음 글은 이러한 PER에 근거하여 주가를 어떻게 책정하고 판단해야 하는지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글이다.

좋은 글 같아서 소개해 드린다.

(*PER = 1주당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가격. 즉 회사의 순이익에 대해 주가가 몇 배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나 나타내는 수치이다)






‘영업이익의 140배’ 안랩 주가, 어떻게 봐야 하나






[영업이익과 시가총액]

뚜렷한 원인 없이 이익 대비 주가 한때 20배→140배
시장 평균은 10배 정도…신중한 검토로 낭패 피해야

위 그림은 최근 선거를 테마로 크게 움직이고 있는 안랩(옛 안철수연구소)의 주가 움직임이다. 안랩의 시가총액과 매출액, 그리고 영업이익을 같이 그린 것이다.

보통은 주가와 1주당 순이익을 비교해, 여기서 일정한 배수를 찾아낸 뒤 이를 기준으로 주가가 높다 또는 낮다고 말한다. 주가와 1주당 순이익에 총발행주식 수를 곱하면 바로 시가총액과 순이익이 나오므로 주가이익배수란 바로 시가총액과 순이익을 비교한 것이 된다. 여기서 순이익이 아니라 영업이익을 비교한 것은 영업이익이 회사의 영업실적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회사의 시가총액과 영업이익을 서로 비교해 보자. 이 둘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보통 영업이익의 몇 배에서 주가가 만들어지는지 짐작하기 위해서다.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2011년 여름까지만 해도 약 2000억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연말에는 놀랍게도 1조4000억원까지 뛰어, 주가가 6개월 사이에 7배나 올라버렸다. 그 뒤에는 다시 떨어지고 있는 중인데, 현재는 약 8000억원 근처까지 떨어졌다. 여전히 과거에 비해서는 4배나 높은 수준이다.

이 회사의 과거 시가총액과 영업이익의 관계를 보면, 좋게 말해도 영업이익의 10~20배 사이에서 시가총액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회사가 갑자기 이익의 140배 수준으로 주가가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최근 2달 사이에 주가가 50% 떨어졌다.

주가가 이렇게 급등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실체에 무슨 변화가 있어 앞으로 이 회사의 영업실적이 매우 좋아질 만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회사의 영업환경이나 회사의 실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자, 이제 이 회사의 시가총액이 약 1조4000억원이었을 때 이 주식을 산 사람의 입장에서 회사의 장래를 짐작해 보기로 하자. 이때 주식을 산 사람은 여기서 일정 정도 투자수익을 기대하고 주식을 샀을 것이다. 5년 뒤에 이 회사의 주식이 2배로 올라간다고 보자. 그러면 연간으로 약 15% 주식이 올라간 것이다. 그래서 이때 시가총액이 2조8000억원이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당시 이 회사의 주가이익배수가 약 15배라고 가정하자. 과거 한국 주식시장의 평균 주가이익배수는 대략 10~15배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당시 이 회사의 순이익은 1870억원이 되어야 한다. 지금 영업이익이 약 100억원이므로 이 회사는 앞으로 5년간 매년 영업이익이 약 80%씩 늘어나야 5년 뒤에 1870억원이 된다.

만약 어떤 투자가가 이런 예상을 하고 이때 이 주식을 샀다면 그 뒤 이 회사의 주식이 어떤 이유로 50% 떨어졌다 해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곧 영업실적이 크게 늘어나서 주가가 5년 뒤에는 다시 높이 올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짐작 없이 그냥 올라가는 시세를 보고 이 회사 주식에 뛰어들었다면 지금쯤은 큰 낭패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회사의 가치를 보고 주식에 투자를 한 것이 아니다. 마치 문방구에서 아이들 장난감 돈놀이처럼 종이 위에 찍힌 숫자 돈을 보고 돈놀이 장난을 한 것이다. 아이들만 장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장난을 한다. 자기보다 더 바보가 있어서 자기가 산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주고 이 종이돈을 살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바보놀이를 한 것이다.

과연 주식의 가격은 어떻게 매겨지는 것일까? 정말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물음을 달리 해보자. 회사란 과연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구나 쉽게 할 것이다. 그렇다. 모든 회사는 값어치를 가진다. 그럼 그런 회사에 대해 얼마의 값어치를 매겨야 할까?

값을 매기는 것은 고스톱과 비슷하다. 고스톱에서도 1점에 얼마라고 값을 매긴다. 처음에는 1000원이라고 시작하지만 열을 받으면 1만원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주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가 만들어내는 1원의 이익에 대해 주가로 얼마를 매길지 정하면 된다. 그러나 고스톱과 주식은 다르다. 즉, 고스톱은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하고 값을 매긴다. 그러나 주식에서는 이런 약속이 없다. 이 회사가 만들어내는 1원의 이익에 얼마의 값을 매길 것인지 서로 약속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그 회사가 만들어내는 1원의 이익에 대해 주가를 매기는 값어치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수준은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시장의 평균 가격이라고 한다. 지금 시장에서 이 평균 가격은 약 10원이다. 즉 주가이익배수는 약 10배라는 말이다.

물론 어떤 회사의 장래가 밝아 보이면 이 배수는 올라간다. 20배일 수도 있고, 30배일 수도 있다. 또는 장래가 어두워 보이면 5배로 떨어지기도 한다. 어떤 회사의 미래를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활발하게 거래가 일어난다. 그러나 20배 수준이던 회사가 갑자기 140배로 올라가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장난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장난은 장난으로 끝나야 한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 낭패다.


Copyright : 한겨례, 2012.3.19.

지난 2000년간 전세계 GDP 비중 변화




놀라운 그림이다. 역시 중세 이전에는 황하문명, 인더스 문명의 후손인 중국과 인도가 월등히 세계를 지배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래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짚어보자면

1. 미국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라는 사실.
2. 중국과 인도의 놀라운 성장
3. 일본과 러시아의 급격한 추락

정도가 되겠다.

그래프 작성자가 이 자료를 어떻게 모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1인당 GDP도 이렇게 그릴 수 있는지 궁금하다.


마하트마 간디 2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Copyright: Vithalbhai Jhaveri

 간디가 인도에 오고 1년간 그는 한 번도 법정에서 승리한 적이 없는 무능력한 변호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다 압둘라(Dada Abdulla)라는 한 인도 상인으로부터 간디에게 법률 자문을 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것은 간디에게 매우 긴 시간동안 남아공에 거주할 것을 요구하는 의뢰였고, 간디는 20년동안 그 곳에 살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남아공에는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곳에 거주하던 인도인들은 상당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상태였다. 그들은 정치적 권리도 없었고, 백인들로부터 'Coolies'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간디는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당시 남아공에서 인도인 얼마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는, 다음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날 간디는 피터메리쯔버그에서 1등석 티켓을 타고 우아하게 앉아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승무원들이 몰아닥치면서 그는 하등칸으로 쫓겨나게 된다. (의역)


이 사건으로 인해, 드디어 간디는 정치적인 시각을 트이게 되고, 위대한 인도의 지도자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비폭력, 비저항주의'라는 뜻의 'Satyagraha'라는 개념을 주창하게 된다. 간디는 자기 자신을 Satya(진실), 그리고 오로지 Satya랑만 결합될 수 있는 Ahimsa(비폭력, 사랑), 마지막으로 Brahmacharya(신에 대한 강한 신념)에 대한 독실한 신자라고 줄곧 설명하곤 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이러한 Satyagrapha에 대해 연마하는 과정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추구한 목적은 '억압자와 억압받는자 모두 그들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과 '자유는 그것이 억압받지 않을 때 진정한 자유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남아공 거주 인도인들에게 인두세(人頭稅)를 매기고 있었고, 기독교 방식이 아닌 인도인의 결혼은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래서 간디는 그의 저서인 'Satyagrapha in South Africa'에서 인도인들이 그들의 억압받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1909년이 되던 어느 날, 간디는 다시 이 모든 여정을 뒤로 한 채 인도로 잠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Hind Swaraj or Indian Home Rule' 이라는 짧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 논문을 필두로 산업화와 근대화의 모든 측면에 대한 비평을 하기 시작한다.



간디는 1915년에 남아공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인도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1931년에 잠깐 유럽에 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인도 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아무도 간디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간디는 꿋꿋하게 그의 정치적 스승인 고크할레(Gokhale)의 조언을 받으며 공부를 했고, 그가 공부한 내용을 당시 인도의 상황에 적용하려 노력하였다.

그 후 간디는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지역 항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비하르(Bihar) 지방에서 있었던 Champaran 항쟁이다. 그것은 당시 비하르 인디고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강압적인 노동 환경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 아메다바드(Ahmedabad)의 직물 제조공장에서 노동자와 관리자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운동을 꼽을 수 있다.

이렇게 간디는 전국 방방곳곳의 지역 항쟁에 참여를 하면서,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이렇듯 민족주의 정치의 방향을 재빠르고 강력하게 지휘해 나가던 모습은, 그가 1919년, Rowlatt 법이라는 강압적인 법에 대항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리고 간디는 그 시점을 전후로 인도의 유명한 작가였던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로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 호칭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펀잡(Punjab) 지방에서 소동이 발생하게 되고, 이로인해 많은 비무장상태였던 인도인들이 잔인하게 대량학살된다. 이에 분노한 간디는 펀잡국회조사위원회(Punjab Congress Inquiry Committee)에 관한 보고서를 쓰게 된다.


그 후로 2년간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벌이게 된다. 비협조 운동이란 인도인들로 하여금 영국 법인과 관련된 모든 것에 협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영국인에게 빼앗긴 명예를 되찾고, 자기 의존(독립)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비협조 운동이 확산되면서 영국 정부가 거의 인도에서 무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비협조 운동은 1922년 2월, 작은 시장도시였던 차우리 차우라에서 많은 인도 경찰관들이 영국인들로부터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중단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간디는 바로 체포가 되었으며, 폭동 선동죄라는 죄명을 부여받고 6년간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6년 후 최종 재판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영국의 비합리적인 법에 대해 건방진 말투로 고발을 하였다. 



(원문)



After one year of a none too successful law practice, Gandhi decided to accept an offer from an Indian businessman in South Africa, Dada Abdulla, to join him as a legal adviser. Unbeknown to him, this was to become an exceedingly lengthy stay, and altogether Gandhi was to stay in South Africa for over twenty years. The Indians who had been living in South Africa were without political rights, and were generally known by the derogatory name of 'coolies'. Gandhi himself came to an awareness of the frightening force and fury of European racism, and how far Indians were from being considered full human beings, when he when thrown out of a first-class railway compartment car,
though he held a first-class ticket, at Pietermaritzburg. From this political awakening Gandhi was to emerge as the leader of the Indian community, and it is in South Africa that he first coined the term satyagraha to signify his theory and practice of non-violent resistance. Gandhi was to describe himself preeminently as a votary or seeker of satya (truth), which could not be attained other than through ahimsa (non-violence, love) and brahmacharya (celibacy, striving towards God). Gandhi conceived of his own life as a series of experiments to forge the use of satyagraha in such a manner as to make the oppressor and the oppressed alike recognize their common bonding and humanity: as
he recognized, freedom is only freedom when it is indivisible. In his book Satyagraha in South Africa he was to detail the struggles of the Indians to claim their rights, and their resistance to oppressive legislation and executive measures, such as the imposition of a poll tax on them, or the declaration by the government that all non-Christian marriages were to be construed as invalid. In 1909, on a trip back to India, Gandhi authored a short treatise entitled Hind Swaraj or Indian Home Rule, where he all but initiated the critique, not only of industrial civilization, but of modernity in all its aspects.


Gandhi returned to India in early 1915, and was never to leave the country again except for a short trip that took him to Europe in 1931. Though he was not completely unknown in India, Gandhi followed the advice of his political mentor, Gokhale, and took it upon himself to acquire a familiarity with Indian conditions. He traveled widely for one year. Over the next few years, he was to become involved in numerous local struggles, such as at Champaran in Bihar, where workers on indigo plantations complained of oppressive working conditions, and at Ahmedabad, where a dispute had broken out between management and workers at textile mills. His interventions earned Gandhi a considerable reputation, and his rapid ascendancy to the helm of nationalist politics is signified by his leadership of the opposition to repressive legislation (known as the "Rowlatt Acts") in 1919. His saintliness was not uncommon, except in someone like him who immersed
himself in politics, and by this time he had earned from no less a person than Rabindranath Tagore, India's most well-known writer, the title of Mahatma, or 'Great Soul'. When 'disturbances' broke out in the Punjab, leading to the massacre of a large crowd of unarmed Indians at the Jallianwala Bagh in Amritsar and other atrocities, Gandhi wrote the report of the Punjab Congress Inquiry Committee. Over the next two years, Gandhi initiated the non-cooperation movement, which called upon Indians to withdraw from British institutions, to return honors conferred by the British, and to learn the art of
self-reliance; though the British administration was at places paralyzed, the movement was suspended in February 1922 when a score of Indian policemen were brutally killed by a large crowd at Chauri Chaura, a small market town in the United Provinces. Gandhi himself was arrested shortly thereafter, tried on charges of sedition, and sentenced to imprisonment for six years. At The Great Trial, as it is known to his biographers, Gandhi delivered a masterful indictment of British rule.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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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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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모르는 사이에, 경멸적인, 얼마나, 칸막이, 신조어를 만들다(주조하다), 의미하다, 강력하게, 독실신자, 이해하다/마음에품다, (사상등을)연마하다, 둘다 같은(A and B alike), 인두세, 논문, 우월함, (항해)키를 잡다, 덕망, 빠뜨리다, 바로 그 사람 누구누구, 폭동/소요사태, 조사/심리, ~~에의해 수여된, 마비되다, 중단되다, 그 후, 폭동 선동, 건방진, 기소/고발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Copyright: Vithalbhai
Jhaveri/ GandhiServe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뽀르반데르(Porbander) - 현재의 구자라트(Gujarat) 지방 - 의 한 작은 마을에서 1869년 10월 2일에 태어났다. 간디가 어릴적, 그는 아버지가 지역 장관 고문을 하고 있던 라즈콧(Rajkot) 근처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 때 당시 인도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500개 정도의 영역과 공국, 주 들은 국내적 일에 관련하여 자치가 허용되었었다. 이 들 주는 'Native States'라고 불리는데, 간디의 아버지가 일하던 라즈콧(Rajkot) 지방도 그 중에 하나였다.






 간디는 나중에 늙어서 그의 어릴적 시절에 대하여 '진실에 대한 시험(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에 기록하였다. 간디의 아버지는 간디가 학교를 마치기 전에 죽었으며, 그후 간디가 13살이 되던 해 동갑의 카스투르바(Kasturba)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1888년 어느 날, 간디는 영국에 가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떠난다. 간디의 모든 집안 어른들은 그것을 말렸지만, 정작 그 자신의 결심은 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간디는 술, 여자, 고기를 가끔씩 먹고 즐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그의 어머니는 간디에게 영국에 가 있는 동안 절대 와인과 여자, 고기를 접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그리고 간디가 인도를 떠날 때, 그에게는 몇 살 안된 아들 하리랄(Harilal)이 있던 상태였다.



런던에서 간디는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신을 봤다고 주장하는 견신론자, 채식주의자, 그리고 당시 영국의 산업 혁명 바람으로 인해 계몽이 되고 있던 다른 모든 계몽된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영국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한다고 간디에게 소개하였다. 간디는 힌두교의 정통 신자였지만, 이 모든 사람들에게 감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런던에서 그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게 소개되어 찾아가서 결의에 차서 목적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이 문장이 조금 이해가 안됨).

이 모든 사건을 뒤로하고, 간디는 마침내 1891년, Inner Temple에서 변호사 시험에 붙게 된다. 그는 변호사 합격 후 영국 런던 고등법원에서 잠깐 일했다. 하지만, 결국 그 해를 못넘기고 인도로 돌아오게 된다.(다큐멘터리에 의하면, 간디가 그때 소심한 성격 탓에, 첫 법정에서 패배를 맞보고 실의에 가득 찼다고 전해짐.)






(원문)
Mohandas Karamchand Gandhi was born in the town of Porbander in the state of what is now Gujarat on 2 October 1869. He had his schooling in nearby Rajkot, where his father served as the adviser or prime minister to the local ruler. Though India was then under British rule, over 500 kingdoms, principalities, and states were allowed autonomy in domestic and internal affairs: these were the so-called 'native states'. Rajkot was one such state.




Gandhi later recorded the early years of his life in his extraordinary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with Truth. His father died before Gandhi could finish his schooling, and at thirteen he was married to Kasturba [or Kasturbai], who was of the same age as Mohandas himself . In 1888 Gandhi set sail for England, where he had decided to pursue a degree in law. Though his elders objected, Gandhi could not be prevented from leaving; and it is said that his mother, a devout woman, made him promise that he would keep away from wine, women, and meat during his stay abroad. Gandhi left behind his son Harilal, then a few months old.

In London, Gandhi encountered theosophists, vegetarians, and others who were disenchanted not only with industrialism, but with the legacy of Enlightenment thought. They themselves represented the fringe elements of English society. Gandhi was powerfully attracted to them, as he was to the texts of the major religious traditions; and ironically it is in London that he was introduced to the Bhagavad Gita. Here, too, Gandhi showed determination and single-minded pursuit of his purpose, and accomplished his objective of finishing his degree from the Inner Temple. He was called to the bar in 1891, and even enrolled in the High Court of London; but later that year he left for India.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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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국, 자치, 독실한, 견신론자, 계몽된, 변두리의

인도를 알기 위해서는 간디부터 알아야 한다.

현재 인도에 4개월째 거주중이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인도인의 정서, 생활,, 그들의 문화, 교류..에 대해서 서서히 느껴가고 있다.

그러던 와중 문득 간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현듯 번개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도를 알고 느끼기 위해서는 간디를 알아야 한다."
"You should learn Gandhi first to see and feel the India!"

실제 인도에 대해 모르고 간디를 접하는 것과

인도를 경험하고 느끼는 와중에 간디를 접하는 것은

커다란 영감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재 인도인의 정서와 문화, 생활 속 모든 것에

간디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인도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간디에 대해 파헤쳐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떠한 위인이었으며, 어떠한 지도자였고, 어떠한 개인이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해 볼 것이다.

그리고 간디를 알고 인도를 보는 느낌은, 지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어린이들을 세균에 노출시키자(Exposure to dirt in childhood promotes immunity)


재밌는 연구결과이다.
어릴때 세균에 적당하게 노출시킬수록 면역력이 더 강하고 오래 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태어나고 얼마 안된 후 세균에 노출된 것과, 어른이 되어서 세균에 노출된 것이
면역력의 발달에 차이를 가져온다고 하니
눈여겨 볼만 하다.


The concept of exposing infants to germs in order to build up immunity is known as the hygiene hypothesis. Now, researchers of Brigham and Women’s Hospital (BWH) have come up with evidence supporting the hygiene hypothesis for the first time.

They studied the immune system of ‘germ-free mice’ and compared them to mice living in a normal environment with microbes, the journal Science reported.

They found that ‘germ-free mice’ had exaggerated inflammation of the lungs and colon resembling asthma and colitis, respectively, caused by the hyperactivity of a unique class of T cells (immune cells).

These immune cells had been previously linked to these disorders in both mice and humans, said a university statement.

Most importantly, researchers discovered that exposing the germ-free mice to microbes during their first weeks of life, but not when exposed later in adult life, led to a normalized immune system and prevention of diseases.

Moreover, the protection provided by early-life exposure to microbes was long-lasting, as predicted by the hygiene hypothesis.

“These studies show the critical importance of proper immune conditioning by microbes during the earliest periods of life,” said Richard Blumberg, chief for the BWH Division of Gastroenterology, Hepatology and Endoscopy, and study co-author, working with Dennis Kasper, director of BWH’s Channing Lab.


Copyright : TheHindu.com, IANS, WASHINGTON, March 26, 2012

세균, 결장

인도, 구강암과 자궁경부암으로 인한 암사망이 가장 많다.(Tobacco-related cancers, cervical cancer cause most deaths in India)


인도의 2010년 암 사망에 관한 분석결과가 나왔다.

전체 죽음의 71%가 암으로 인한 사망이며
남자의 경우 구강암이 1위, 여자의 경우 자궁경부암으로 인한 사망이 1위다.

인도에 살다 보면, 길거리에서 파는 씹는 담배를 어딜 가나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애용한다.
이빨과 입술 사이에 가루같은것을 끼우고 30분가량 침을 머금고 있다가 뱉는 방식인데
그것이 구강암에 그렇게 안좋다고 한다.

인도에서 구강암이 남자 암 원인 1위인것도 바로 그것 때문일것이다.

또한 이 분석 보고서에서는 지역별 차이와 종교별 차이도 살펴보고 있다.

일단 재밌는것은 못 사는 9개 지역이 잘사는 지역보다 사망률이 낮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문맹률이 높을수록 암 사망률이 거의 두배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자는 교육의 보급과 문맹률을 낮추는것이 암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재밌는 사실은 무슬림의 경우 구강암이나 자궁경부암에서 다른 종교보다 사망률이 낮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무슬림의 금욕적인 생활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겠다.


결국 이 모든 암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담배 관련 세금을 인상하고 담배를 사회적으로 줄여 나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씹는 담배 말이다.


A new study looking at cancer mortality in 2010 in India found a high 71 per cent (3,95,400) deaths in people between 30 and 69 years. Cancer accounted for 8 per cent of the 2·5 million total male deaths and 12 per cent of the 1·6 million total female deaths in the same age group. The high mortality rate during the middle age is very different from the developed countries, where cancer deaths occur during old age.

The results are published today (March 28) in The Lancet. The study found that 7,137 of 1,22,429 deaths in 2001-2003 were due to cancer, corresponding to 5,56,400 cancer deaths across the country in 2010.

At nearly 23 per cent, oral cancer caused the most deaths in men. It was followed by stomach cancer (12.6 per cent) and lung cancer (11.4 per cent). In the case of women, cervical cancer was the leading cause (about 17 per cent) followed by breast cancer (10.2 per cent). “All major cancers can be avoided in India,” Prof. Prabhat Jha told this Correspondent over telephone from Delhi. Prof. Jha is from the Centre for Global Health Research, Canada and is the senior author of the paper.

Tobacco-related deaths

The most striking find is that tobacco-related deaths accounted for 42 per cent of all male cancers and 18.3 per cent of all cancers in women. There were twice as many deaths due to oral cancer (due to tobacco chewing) than lung cancer.

The percentages translate to a huge mortality number. Nearly “1,20,000 tobacco-related deaths were seen in both urban and rural areas,” he said. “About 20 per cent was due to chewing tobacco.”

Of the 1,20,000 tobacco-related deaths in 2010, 84,000 were in men and 36,000 in women. At 57,000, rural men were twice more likely to die from tobacco-related mortality compared to their urban counterparts (27,000).

Apart from causing specific cancers, smoking contributes to overall deaths from other diseases as well. In a February 2008 paper in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NEJM), Prof. Jha and others found that total mortality from smoking in India was one million a year.

Bacteria/virus infection caused 19.6 per cent of infection-related cancers — cervical, stomach and liver cancers.

Urban-rural divide

Similarity and differences in cancer mortality in men and women were seen in rural and urban populations. For instance, oral cancer was the leading fatal cancer in both rural and urban areas in the case of men. This was followed by lung cancer in urban areas, and stomach cancer in rural areas.

“It is a combination of chewing and smoking, particularly by men,” said Prof. Jha, explaining why oral cancer was the leading cause in urban areas.

In the case of women, though mortality from cervical cancer was three times higher in rural areas than urban areas, the rate of cervical cancer deaths was nearly the same in both the areas. Likewise, similar mortality rates were seen in the case of breast cancer in both the areas. But rural women had higher stomach cancer rates compared with urban women.

Regional differences

A 30-year-old male in northeast has about 11.2 per cent chances of dying of cancer before he turns 70. It is 6 per cent in the case of women. Contrast this with less than 3 per cent risk for men in Bihar, Jharkhand and Odissa.

Tobacco-related deaths in men in Assam and other northeast States were “greater than the national rates of deaths from all cancers.” “Common and long-term use of tobacco is seen in Assam and other northeast States,” Prof. Jha explained.

Big variations in cancers not related to tobacco are seen in India. “We have no idea why [this is so]. Further research is required,” he said. “That will be useful for India and the rest of the world.”

In the case of cancers common to both sexes, the variation between States was nearly four times. Northeast States, Kerala, West Bengal and Kashmir than other States recorded “particularly high rates of specific cancers.”

Men and women in the nine poorer States (Assam, Bihar, Chhattisgarh, Jharkhand, Madhya Pradesh, Odissa, Rajasthan, Uttarakhand and Uttar Pradesh) have lower risk than the richer States.

Role of education

“Why [this is so] we don't know,” he said about the lower risks in the poorer States. But literacy seems to have had a big role — mortality rates doubled in the case of illiterates.Those with secondary and higher education had lower rates of deaths,” he said. In illiterate men the death rate was 106 per 1,00,000; for women it was 107 per 1,00,000. “Those with secondary and higher education had lower death rates — 46 per 1,00,000 in men and 43 per 1,00,000 in women,” he explained.

After taking age into account, the death rates between least and most educated women came out very clearly in “oral cancer followed by stomach and cervical cancers. Rates of breast cancer varied little with education,” the authors highlight.

Cancer in Muslim population

An interesting find is that in States where Muslim population was higher, cervical cancer risk was “much lower.” For instance, Jammu and Kashmir and Assam, which have 75 and 40 per cent Muslim population respectively, have “less than quarter of the national rates of cervical cancer,” the authors write.

As seen internationally, circumcision in men greatly reduces the chances of sexual transmission of HPV virus. Women also had lower incidence of oral cancer. However, breast and stomach cancers were much higher.

Muslim men, however, had higher mortality rates than Hindus in the case of all cancers except liver cancer.

Tobacco control

Tobacco control is the best vaccine for lung and oral cancer,” he stressed. “Tobacco is the single most cause of many deaths. Tobacco companies have be beaten in other countries. It is just a matter of time before it happens here.”

Big tax hike is the answer,” Prof. Jha said emphatically. “France tripled the price in ten years and the consumption halved and revenue doubled.” Mexico has increased tax by 30 per cent. “Philippines wants to hike it by 200 per cent. They hope to introduce it next year,” he added.

According to him, it is possible to cut many oral, breast and cervical deaths even in rural areas by early detection and treatment. “You don't need super-speciality hospitals in rural areas. Basic services to detect and refer them for treatment is enough,” Prof. Jha underlined.

Changing trends

Trends similar to developed countries are slowly beginning to emerge. Even though cervical cancer is still the leading cause of cancer deaths in both rural and urban areas, number of cervical cancer is dropping in urban areas. However, the number of breast cancer deaths is increasing. “Big drivers of breast cancer are changing in India — late pregnancy and early menarche,” he noted. “Breast cancer development is similar in rural and urban areas.” But deaths are more in rural areas due to lack of early detection.

The data for the study was collected by resorting to verbal autopsy in 2004-2005. In verbal autopsy the details of the cause of death in the family is collected from a family member. Only 7,137 of the total deaths (1,22,429) were due to cancer, and this corresponds to 5,56,400 deaths across the country in 2010.

Though the 2003 figures have been forward projected to 2010, there is not much chance of gross error creeping in as nearly 80 per cent of cancer deaths in people older than 15 had a “crude previous diagnosis of cancer by a physician, suggesting some medical confirmation of cancers,” the authors write.

Though verbal autopsy cannot provide correct diagnosis of specific cancers where the organs are close to each other, like stomach, misclassification is less likely in the case of oral, cervical and breast cancers.

Since India has only 24 urban population-based cancer registries and just two rural registries, the authors assessed cancer mortality in the Million Death Study (MDS), which is led by the Office of the Registrar General of India. MDS is one of the few large, nationally representative studies of the cause of deaths, including rural areas.


Copyright : TheHindu.com. R. PRASAD, CHENNAI, March 28, 2012

한 부분, 나이를 고려할때, 할례(포경수술), 초경, 사후검시

미국의 이란 압박정책에 손을 들어주는 인도(India will not apply for U.S. sanctions exemption on Iran)


인도가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밧줄타기를 하고 있다.


미국의 이란에 대한 경제(석유 수입 제한)/군사적 압박에 대해 인도는 미국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미국의 이런 행동에 대해 EU와 일본은 이미 제외신청을 했다.


이미 인도의 이란 석유 수입은 09년부터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


인도가 만약 미국의 편을 계속 들 경우 이란으로부터의 석유 수입 및 그로인한 경제적 부가가치에 대해서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가 풍부하지 않은 인도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중용을 지키는게 좋아 보인다.










Even as the U.S. steadily tightens the screws on the sanctions regime against Iran, energy-deficient, rapid-growth nations such as India are finding themselves walking a tightrope with their continued but declining reliance on Iranian oil imports.


Ten European nations and Japan have already been given an exemption from punitive actions by the U.S. for purportedly reducing their oil imports from Iran “significantly.”


Yet India in particular would appear to be purposefully walking a line that sacrifices neither its core interest, the need to meet the demands of more than 400 million Indians with no access to commercial energy, nor its commitment to adhere to United Nations sanctions regimes.


Last week the U.S. put out its most direct message on Iran yet — that India, along with other importers of Persian oil, could face sanctions by July if it too did not reduce such imports “significantly” — a term that has not been defined quantitatively in the U.S. 2012 National Defence Authorisation Act (Section 1245), except to allude, by comparison, to Japan's reduction of 15-22 per cent.


At this point India remains in compliance with United Nations sanctions against Iran, yet it has, however, refused to recognise any country-specific sanctions overlay above this globally accepted level.


Consistent with this position it appears that India will not be making an application for a sanctions exemption from the U.S.


Whether private companies engaged in the oil trade with Iran independently start reducing their volumes is another question.


Some of these companies are said to be facing constraints on their business in any case, given the broader sanctions against Iranian central bank and other financial institutions, and the knock-on effect that that has in terms of payment instruments.


If that trend continues India may find itself meeting the U.S.' demands without any extra effort to do so.


While India reportedly imported 21 million tonnes of Iranian oil in 2009-10, that dropped to around 18 million tonnes in 2010-11.


If further efforts had to be made, however, those seeking to press country-specific sanctions on Iran would have to take account of the fact that Indian refineries processing light crude from Iran would need to have their capital-intensive infrastructure modified, and that is likely to be expensive.


Alternative approaches that India may independently decide to follow, should the need arise, could entail the use of wheat exports to Iran that would help India avoid being branded as a contributor of hard currency to Iranian coffers.




(Copyright : TheHindu.com , NARAYAN LAKSHMAN, WASHINGTON, March 28, 2012)




(군사적) 제재, 정권, 들리는 바에 의하면(reportedly), 인정하다, 승낙하다, 압박, 고려하다, ~라고 낙인찍히다,  금괴

인도, 세계 에서 두 번째로 자신만만한 나라(India world's 2nd most economically confident country: Ipsos)


국제적 설문단체인 IPSOS에 따르면
인도가 싸우디 아라비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자신감이 높은 나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으며, 반면 유럽의 여러 국가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더블딥 우려 때문일것이다.)


인도 국민들이 이처럼 경제에 대해 자신있어 하는것은, 몇년간의 높은 경제 성장과 몰려오는 외국인 투자바람, 그리고 최근들어 인플레 우려가 완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인도 국민이 자신있어 하는만큼
실제로 인도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된다.










New Delhi: Indians have emerged as the second most confident people about their economy across the world on easing inflationary pressure and increased foreign investments, says a report.


According to global research firm Ipsos, India's economic confidence jumped by 9 points to 74 percent in the month of February compared to the previous month, becoming the second most economically confident country after Saudi Arabia which tops the chart with 90 percent.


Sweden is the third most economically confident country, where 73 percent are optimistic about their economy, followed by China (72 percent), Germany (71 percent), Australia (66 percent) and Canada (65 percent).


"The Indian economy has continuously recorded high growth rates and has become the second most preferred destination for foreign investments and business. India's economic growth is expected to remain robust in 2012 and 2013, despite likely headwind of double-dip recessions in Europe and the US," Ipsos India CEO Mick Gordon said.


More than half of Indian citizens (51 percent) believe their local economy which impacts their personal finance is good and 56 percent people expect that the economy in their local area will be stronger in next six months, Ipsos said.


Mick further noted that inflationary pressure eased as the wholesale price index fell, making daily consumption items relatively affordable and giving hopes that Reserve Bank of India will ease its monetary policy stance by reducing the policy rates in the coming months which will further fuel economic growth of the country.


The report, which examined citizens' assessment of the current state of their country's economy said the overall global average economic confidence remained unchanged at 38 percent last month.


On the other hand only a handful of those in Hungary (3 percent) rate their national economies as 'good', followed by Spain (4 percent), Italy (6 percent), France (7 percent), Japan (9 percent) and Great Britain (10 percent).


Countries with the greatest improvements include India, China, Mexico, Saudi Arabia and Turkey, while, countries with the greatest declines are Argentina, Poland, Belgium, Indonesia and Australia.


The survey was conducted in February this year among 19,216 people in 24 countries like Argentina, Australia, Belgium, Brazil, Canada, China, France, Germany, Great Britain, Hungary, India, Indonesia, Italy, Japan, Mexico, Poland, Russia, Saudi Arabia, South Africa, South Korea, Spain, Sweden, Turkey and the USA.


Copyright : zeenews.india.com   (Tuesday, March 27, 2012, 21:11)




맞바람
영향끼치다
평가

뭄바이 수도세 인상법안, 변기속으로 내려갈것인가.(Water tax hike may be watered down)


뭄바이의 물 공급을 주관하는 BMC부서와 집행위원회 사이에서 물값 인상을 놓고 말이 많다.
BMC는 물값은 57%나 올리자고 주장하고 있고
집행위원회는 이에 대해 서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반대를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법안이 처음 발의 되고부터 아직 결정이 안 난 상태이며
여전히 논쟁 중이다.








If the civic standing committee gives the Brihanmumbai Municipal Corporation's (BMC) administration the nod on Wednesday, you will have to pay more for the water you use and the sewage you generate. If you live in an old building in south Mumbai, you may also have to pay more property tax.


The BMC has tabled two proposals before the committee, one asking for a 14% to 57% hike in water charges, and the second, for a revision of the property tax system.


However, strong political opposition to the water tariff hike is likely to ensure that the hike is not as drastic as proposed, said insiders. "As for the new property tax system, it is likely to be deferred yet again," sources said.
Both proposals are expected to face opposition from corporators across all parties. Wary of adverse public reaction, the ruling Shiv Sena-BJP alliance is opposed to the water tariff hike and is negotiating with the civic administration to lower the proposed tariff. The alliance is also likely to dismiss the proposal to hike water and sewerage charges by up to 8% a year.
Rahul Shewale, chairman of the standing committee, said: "We are against hiking the water tariff as proposed in the budget. We will ask the administration to revise and reduce the rates so that the hike does not hurt the common man."
Dilip Patel, the BJP group leader, also insisted that the hike cannot be so high. "We have demanded that the rates be reduced for residential and slum properties. We don't mind the hike for commercial properties," he said, adding that instead of drastic hikes, the BMC should focus on improving its bill collections.
The civic chief, in his budget speech, had referred to how various state departments owe the BMC nearly Rs 1,600 crore.
"If the committee does not agree to these rates, we will have to renegotiate and reduce the proposed water tariff, but we can't do without the hike this year," said a civic official, requesting anonymity.
All indications are that the corporators will dither over the proposal to bring in the new capital value-based property tax system.
The standing committee has rejected an older proposal and has been delaying the approval of the new system ever since it was tabled in November 2011.


Copyright : Hindustan Times. 2012.3.28

B.C. 563~483 싯다르타/석가모니(Gautama Buddha)(영어+번역)


(고행하는 석가모니)



[563-483 BC]


고타마 붓다, 석가모니(Gautama Buddha)




석가모니는 기원전 563년 고타마(Gautama) 가문의 샤카야(Shakaya) 파벌에서 태어났다. 사카야 파는 카스트제도에서 성 전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싯다르타(석가모니)의 아버지는 사카야 파의 우두머리였고, 싯다르타는 사실상 운명이 정해진 왕자였다. 그가 어릴땐 매우 유복한 생활을 했었고 최고의 교육과 아버지의 부를 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삶에 힘겨워하는 싯다르타를 부끄러워하고 숨기기도 하였다.

싯다르타는 야쇼다라(Yashodhara)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버지의 집에 같이 살았었다. 그는
여전히 삶의 힘겨움을 느끼면서 집에서 보호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야쇼다라는 아들을 한명 낳았는데, 그때는 싯다르타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작은 탈선을 하며 세 가지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삶에 깊은 진실에 대해 눈뜨게 된다. 그가 본 것은 세 종류의 사람이었다. 첫 번째는 나이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며 한탄을 하던 늙은 남자였다. 두 번째는 병으로부터 고생하는 아픈 남자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싯다르타가 본 것은 죽은 남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자는 그를 매우 충격에 휩쌓이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그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늙은 나이, 질병의 고통, 그리고 죽음, 이 세 가지가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깨달음으로 인해 그는 그때부터 진실에 대해 모색해가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인생 뿐만 아니라, 수백만명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즉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는 이야기)

싯다르타가 29살 되던 해, 그는 집과 아내, 아들, 그리고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떠나게 된다.즉,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저버리고 궁전을 떠난 것이다. 그는 두 명의 브라만 수행자를 만나 요가 명상을 공부하였으며, 그로 인해 황홀과 고요한 명상 두가지 측면에서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절대적 진실에 대한 그의 욕구는 아직 충족되지 못했다.

그 다음 6년간, 싯다르타는 극단적인 단식과 숨을 참는 수련을 하면서 처절한 고행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거의 죽을 뻔 했지만, 여전히 완벽한 진실에 대한 그의 욕구는 충족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의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싯다르타는 절대적 진실이 바로 그의 눈 앞에 나타날 때 까지 명상을 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보리수 나무 밑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명상에 들어간다.

기원전 528년, 그가 35살때, 보름달이 밝은 어느 날 밤이었다. 싯다르타는 드디어 정신적 계몽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계몽된 인간'이라는 뜻의 붓다(Buddha)가 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발견한 절대적 진실에 대해, 그의 옆에서 같이 수련하던 5명의 고행자들에게 바로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몇 주간의 휴식 후, 그는 그가 얻은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Deer Garden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의 첫 번째 설교인 "The turning wheel of Dharma."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특히 정신적 계몽과 그 방법에 대하여 한 번도 사람들을 가르쳐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쳐야 겠다는 강한 의지에 불타올랐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중도'라고 칭하였는데, 왜나하면 그것이 극단적 고행과 자유로운 방종의 중간정도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5년간, 그는 '붓다'('석가모니' - 샤카야(석가)의 현인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수도승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것을 (산가)Sanga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45년을 가르친 후 그는 결국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이르게 된다.



(영어 원문)

Gautama Buddha

Sidhartha was born (c. 563 BC; Kapilavastu, Nepal) into the Gautama family of the Shakaya clan. The Shakayas were members of the priestly-warrior caste. In fact, Sidhartha's father was the head of the tribe so Sidhartha was a prince and seemed destined to rule. He lived a luxurious life and the received the best education his father's wealth could provide, but his father also sheltered him from life's hardships.

He married a woman named Yashodhara and they lived in his father's house.   Sidhartha was still protected from the trials of life.  Yashodhara bore a son, and Sidhartha believed that he was happy.

Then, during one of his few excursions from the protection of his father's palace, Sidhartha saw three things which opened the harsh realities of life to him.   He saw an old man, suffering from the frailties of age.  He saw a sick man, suffering from disease.  He also saw a dead man, which shocked him greatly.  He finally realized that the infirmities of old age, and the pain of sickness and death caused suffering that he had never experienced. This revelation caused him to begin a search for truth that drastically changed his life, and, eventually, the lives of millions.

At the age of twenty-nine he left his home, his wife, his son, and his father.  He gave up his claim to the succession of his father's throne and left the palace. He studied  Yogic meditation with two Brahman hermits and achieved high cognitive states in both trance and meditation, but his desire for absolute truth was not satisfied.

For the next six years, Sidhartha placed his body under severe asceticism, which included extreme fasting and suspension of breathing. These practices almost killed him, but they did not satisfy his search for truth.

He finally ended his acetic lifestyle and began to eat. Sidhartha decided to meditate until the absolute truth would lie clearly in front of him. He meditated under a Bodhi tree where he sat facing east.

At the age of thirty-five, on the night of the full moon, Sidhartha reached enlightenment and became an "enlightened one"--a Buddha (c. 528 BC) He had at last discovered the truth he had sought, and he immediately shared it with five ascetics who had practiced near him.

After a few weeks of rest, he decided to teach the way to enlightenment to others and went to Deer Garden where he held his first sermon, " The turning wheel of Dharma." Sidhartha felt a strong call to teach others even though he could never teach the content of enlightenment, only the way of enlightenment.  Buddha called his teachings "the middle way", because it was in the middle between asceticism and indulgence.

For the next forty-five years he taught as the Buddha or "Shakyamuni" (sage of the shakaya"). He also established a community of monks called sanga.

The Buddha died after forty-five years of teaching at the age of eighty.


Copyright : Indihistory.com
번역 : 김태훈

드로이헨-디펜더 2(Defender2) 공략 종결

디펜더 2
드로이헨의 명작 중의 명작이다.
디펜더1도 재밌게 했었는데
얼마전 2가 나와서 해봤다.

인터넷에 아직 공략글은 없고
평소 짬짬이 재밌게 하던 폰게임인지라
공략을 한번 올려드리기로 하겠다.


디펜더 2에서는 원작과 다르게 용암과 성탑 공격을 추가할 수 있으며
플레이어간 1:1 대전을 할 수 있다.
보다 다양한 재미가 추가된 후속작.
그러면 공략을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디펜더 2에서 장기적으로 보고 오래 가려면
무조건 Final Fintasy 활을 사야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크리스탈을 모아야 한다.

크리스탈 250개를 언제 모으냐고?
스킬 업그레이드 안하고 꾸역꾸역 모으면 모아진다.
그리고 컨이 된다면 스킬업을 안해도 모두 깰 수 있다.



1. 스텟 및 스킬


다음 그림은 본인의 파이널 판타지 구입당시 상태




보다싶이 142탄에 스텟 업은 다음과 같고 활은 파이널 판타지 이다.

사실 이 활을 사려고 크리스탈을 250개 모을때까지 조금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컨으로 극복하면 쉽게쉽게 여기까지 올 수 있기도 하다.

이 외의 스킬은 가장 기본 스킬(불, 얼음, 번개) 딱 1개씩  그리고 그걸 찍는데 필요한 마나탑 2

그리고 성벽 체력 8, 매직타워, 용암 각각 1개씩, 매직파워, 용암파워 7개씩, 나머지 스플래쉬, 용암속도저하 1개씩 이다.


사실 매직타워를 찍은 것은 후회한다. 초반엔 좋아보이지만 몬스터가 쎄질수록 전혀 쓸모가 없어진다. 차라리 그 돈과 크리스탈을 모아서 한판이라도 빨리 250짜리 활을 사는게 낫다.
용암은 의외로 쓸만하다. 뒤에서는 몹들이 몰려오는데 성벽에 잔몹이 몇마리 붙어있으면 체력은 깍이지, 그렇다고 걔네 잡았다가는 뒤에 몹들이 몰아닥치지, 난감할 때가 있다. 이때 용암이 잡몹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용암 하나 찍어주고 용암데미지 7정도까지 꾸역꾸역 업해준다면 상당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50짜리 파이널판타지를 사기 전까지 활은 Phantom 3까지만 사용하였다. 그 이상은 크리스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스텟업으로 극복하였다.



(스텟 만랩 기념~)


2. 스텟 순서.

그러면 이제 보다 자세하게 스텟 찍는 순서를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일단 시작하고 계속 힘1, 공격속도1씩 번갈아가면서 꾸준히 찍어준다. 
파워샷과 크리티컬은 딱 3개씩만 찍어주도록 한다. (150탄 전까지는 별 필요가 없다.)

그렇게 힘20, 공속 20이 될때까지 찍어주고, 그때부터 멀티샷만 찍는다. 멀티샷 5가 될때까지 말이다. 이때가 조금 고비다. 그래도 참고 찍어야한다. 그래야 멀티샷 5때 화살이 3개가되면서 게임이 쉬워진다. 

힘20때부터 멀티샷을 찍는 이유는, 그때부터 똑같은 돈으로 힘과 멀티샷을 올린다고 할 때 멀티샷을 찍을 때 올라가는 데미지의 차이가 조금 앞서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멀티샷을 5를 찍으면, 몹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쎄질것이다. 다시 힘과 공속을 30까지 올려준다. (성벽 체력도 처음에는 올리지 말고, 멀티샷 5가 됐을때부터 7정도까지 같이 올려준다.) 그러다보면 크리스탈은 250개가 모여있을 것이고 최종병기를 살 수 있게 된다.



디펜더 2는 1과 다르게 승리할때 체력이 30% 이하여도 크리스탈 보상은 2개가 돌아온다. 그리고 보스전을 크리스탈 보상이 무조건 3개이다. (원작에서는 성 체력이 낮을경우 크리스탈이 1개, 2개씩 들어왔음) 따라서 체력이 1이남건 100이남건 무조건 이기기만 하면서 크리스탈을 모을 수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점이 바로 인터넷 대전이다.

쪼랩때 인터넷 대전은 보통 한판당 3분 이내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이길 경우 상당량의 돈과 크리스탈 1개가 주어진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크리스탈 250을 모으기 위해서 스킬업을 안하고 겜을 진행하다보면 분명히 보스판 등에서 막힐 때가 올것이다. 이때 인터넷 대전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크리스탈을 모아야한다. 인터넷대전은 져도 크리스탈이 깎이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다. 그러면서  보스를 잡을 수 있을 때 까지 스텟을 찍어줘야 한다.


본인의 기억으로는 142판까지 오면서 막현던 판은 5개 이내인 것 같다. 그 때마다 인터넷 대전을 하며 크리스탈과 돈을 모아서 극복했다.







(나중에 스텟이 맥스가 되고 크리티컬이 80% 이상이 되면,  402탄 이상도 퍼팩으로 깰 수 있게 된다)


3. 컨트롤

다음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컨트롤은 초반용 컨트롤이다. 파이널 판타지 활을 사기위해 크리스탈을 모으려면 상당한 컨트롤이 필요하다.
그래서 몇 가지 노하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다.


1) 항상 손가락 터치를 몹 앞의 지점으로

화살의 정확도를 매우 높일 수 있는 손기술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 위치를 잘못 잡고 있는데 손가락을 몹 바로 앞에 위치시켜야 화살이 정확하게 그쪽으로 날아간다.

2) 발석차 잡기

디펜더 2에서는 특이하게 발석차가 나온다. 이놈은 각종 스킬 효과도 안먹히고 원거리에다가 데미지도 상당해서 상당히 골치가 아픈데 컨만 이해한다면 잡기가 쉽다.

발석차가 혼자 나올때는 그냥 발석차만 떼려주면 된다. 발석차가 공격을 하려고 땅에 다리를 박고 준비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동안 떼리면 한 방도 안맞고 충분히 잡는다.

문제는 발석차와 몹이 섞여 나오는 경우이다.

이때는 몹과 발석차의 비율을 잘 생각하면서 공격대상을 정해야한다.

일단 발석차 데미지는 20정도이다. 그리고 각 몹의 평균 데미지를 3이라고 치자.

발석차와 몹이 섞여있을때 몹이 6마리 이상이라면 무조건 몹부터 잡는다. 발석차 잡다가 몹한테 맞는게 더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몹 5마리가량이 성벽을 때리고 있고 뒤에 발석차가 오고 있다면 무조건 발석차부터 잡아주도록 하자. 몹 5마리한테 맞는게 발석차 1개한테 맞는거 보다 낫다.


이 원리만 이해하면 발석차가 2개가 나오건 3개가 나오건 잘 응용해서 잡을 수 있을것이다.


3) 박쥐 잡기.

본인의 공략을 따라하면 크리스탈은 빨리 모으지만 스킬이 없기 때문에 박쥐때문에 곤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컨으로 극복이 된다.

앞서 3개의 기본스킬을 하나씩 찍어준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각종 보스 퇴치 및 박쥐를 잡기 위한것이다.

일단 박쥐가 밀려올때 화살을 흩뿌려가면 체력을 야금야금 깍아준다.
그러다가 박쥐가 중앙 정도 지점에 뭉칠것이다.

이때 얼음을 뿌려서 2/3정도 박쥐를 얼려야 한다.

그리고 안 얼고 공격하는 박쥐를 먼저 쏴서 죽이고
다음 얼어있는 박쥐들을 재빨리 잡아줘야한다.

이렇게 하면 100탄이상에서 박쥐 한턴당 성벽체력 10 이내로 깎이면서 모두 깰 수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박쥐에 이어서 또 박쥐가 나올 때가 있다.

이때는 이미 얼음 스킬을 쓴 상태이고 쿨타임이기 때문에

뒤의 박쥐에게는 손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때도 컨으로 극복할 수 있다.

2번째 박쥐러쉬가 올때 중앙지점에 오기 전에 재빨리 번개를 뿌려준다. 그러면 그걸 맞은놈들은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그리고 중앙지점까지 오는데 시간이 약간 걸린다. 이 짬을 이용해서 번개 안맞은 놈들을 잡고, 그 다음 번개맞은놈들을 잡아주면 된다.




4) 보스 - 망치보스

이놈은 특징이 성벽을 향해 올때는 점프를 하면서 피하는데 일단 성벽에 붙고나면 그 자리에서 가만히 공격만 한다.

그 점을 이용해야된다.

스킬을 쓰면 성벽에서 튕겨나가긴 하는데, 성벽에 올 때마다 스킬을 쓰면 마나 낭비이다.

성벽에 붙었다고 당황하지 말고 일점사를 해준다.

그러면 성벽 체력을 약간 깎이지만, 금방 죽는다.

특히 나중되면 용이랑 망치가 같이 나오는데

그땐 무조건 망치가 성벽에 붙었을때, 스킬로 용 견제만 해주면서 망치를 계속 화살로 쏴야한다.


5) 보스 - 용

이놈이 상당히 까다로울 수 있다.

일단 원거리에서 불을 쏘고 몹을 소환한다.


일단 불을 쏘려고 기를 모을때는 무조건 기본스킬을 아무거나 한개 날려준다.

그리고 몹을 소환할때는 이놈은 불을 쏘거나 기를 모으지 않는다.

따라서 그 때는 무조건 박쥐->성게->펭귄->분홍색 새  순서로 잡아주고 그 다음 다시 용을 때리면 된다.







★Bonus★ 웹배틀 공략.

이것은 거의 모든 스텟을 만랩 찍고 같은 스킬을 보유했을 때 기준으로 쓰는 것이다.
일단 스킬은 전범위 1개, 중범위 1개, 소범위 1개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유성 전범위, 얼음 중범위, 번개 소범위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전범위 유성은 비상시 몹 싹쓸이용
중범위 얼음은 박쥐 얼리기용
번개 소범위는 보스 방해용이다.

웹배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관리이다.
그리고 타이밍만 자세히 이해하면 100전 100승을 할 수 있게 된다.

보스가 나오는 타이밍은 두번이다.
그 외에는 그냥 몹들만 나오고, 스텟 맥스를 찍을 경우 스킬 없이 잡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보스가 나오고 다음 보스가 나올 때 까지 시간 공백이 상당히 길다.

여기서 중요한 것.
보스가 나올때 스킬을 아끼지 말라.
웹배틀은 스테이지 깨는것과 다르다.
무조건 체력 싸움이다.
보스 때는 스킬을 팍팍 쓰면서 최대한 체력 깎이는걸 막아야 한다.
어짜피 다음 보스 나올때까지 시간동안 마나는 다 찬다.
정말 웹배틀 고수들이 하는 걸 봤더니 보스타이밍때 스킬을 안아끼더라.

그리고 또 한가지 팁.
스텟 만랩을 찍어도, 3번째 보스 타임까지 가긴 힘들다.
정말 오래 가봤자 6분대에서 끝나게 된다.
왜냐. 두번째 보스타이밍이 끝난 후 나오는 몬스터들의 수량과 체력이 장난 아니기 때문
특히 성게 녀석이 체력이 거의 용 보스급으로 변한다. 아무리 때려도 안죽는다.

본인의 최고기록은 6분 30초 정도이다.
그 이상은 솔직히 힘들고
그리고 만랩끼리 싸움에서 평균 5분이면 게임은 끝난다.

이기는 자에겐 엄청난 돈과 xp가.
지는 자에게도 소량의 xp가.

솔직히 필자는 스텟과 피 마나 모두 만랩 찍고 나서
스테이지보다 웹배틀을 즐겨 하고 있다.

다음은 웹배틀 스샷들.




(2분 45초, 첫번째 보스 퍼팩으로 가뿐하게 마무리)



(4분 40초, 두번째 보스도 피 270 남기고 마무리. 상대방은 이미 K.O. 상태이다
하지만 불굴의 한국인은 상대방이 죽어도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 법)




(결국 6분 20초로 배틀을 마무리.)





이상 허접한 공략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최종병기 활만 사게되면 그때부터는 천천히 용암도 올려주고 스킬도 올리면서 쉽게쉽게 할 수 있다
.
안드로이드 마켓 세계 1위 를 석권하고있는 디펜더 2

모두 즐겁게 하시길~!






p.s. 참고로 게임을 진행하기 전에 알 수 없는 정보 몇가지를 말씀드리자면

(꾸준히 업뎃중)

1. 용암 2단계 업그레이드하면 원래 있던 용암 넓이만큼 넓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한번 더 최종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크리스탈 290가 추가로 필요하다.

2. 파이널 판타지 활은 래밸 5 단위마다 능력치가 랜덤으로 올라간다.
예를들면 래밸 30때 한번 능력치가 확 오르고, 래밸 35때 다시 확 오르고, 이런식이다.
다만 활을 굳이 빨리 안 사도 된다. 왜냐하면 활을 안 사더라도 능력치는 계속 자동으로 올라가기 때문. 그래도 왠만하면 150판 이전에 활을 사도록 하자.

3. 공격속도의 맥스 래밸은 30이다. 그 이상은 활 능력치로 올리는 수밖에 없다.
화살 데미지의 맥스 래밸은 99이었다. 맥스가 됐을때는 무조건 활 능력으로 올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이널 판타지 활은 반드시 빨리 사야한다.
참고로 데미지와 공격속도 빼고는 모두 9가 맥스 레벨이다.

4. 크리스탈을 아끼더라도 마나 200 정도와 얼음 스킬 2단계까지는 찍어주는게 좋다.
250탄 정도까지 가면 몹들이 너무 뭉태기로 튀어나와서 화살과 컨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들어진다. (랩이 더 높아지고 배틀을 즐기고 싶다면 마나 300 만땅과 스킬을 꾸준히 찍어줄 것을 권함. 솔직히 웹배틀은 스킬 사용과 미세한 컨 차이가 크다.)

5. 온라인 배틀은 실시간이 아닌 녹화 화면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실제 게임 도중 3G가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여전히 화살을 쏘고 있었다.
짐작상 녹화 화면을 다운받은 후 그 화면과 경쟁을 하는 것 같다.

6. 피와 마나의 최대치는 모두 300씩이다. 그 이상은 못올린다.

7. 멀티샷이 래밸 13이 되면 화살이 5개가 나간다.
그리고 멀티샷 스텟 맥스래밸은 9 이기 때문에
나머지 4는 파이널 판타지 활로 올리면 된다.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B.C. 550. 마하비라(Mahavira)의 탄생(영어+번역)

(자이나교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하비라')



바드하마 마하비라(Vardhamma  Mahavira)는 자이니즘(Jainism)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기존 자이나 방식의 가르침을 수정하고 개선하였다. 마하비라는 기원전 559년 파트나(Patna) 근처의 카운디냐뿌라(Kaundinyapura)에서 태어났다. 고학자들은 그의 출생일과 출생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마히비라가 기원전 490년에 바이샬리(Vaishali) 근처의 쿤다뿌라(Kundapura) - 현재의 비하르 지방 - 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마히비라는 매우 상류층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귀족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문학예술, 철학, 군사학, 행정과학등을 배웠다. 마하비라는 야소다(Yasoda)공주와 결혼했으며, 아노짜(Anojja)라는 딸을 두었다. 그가 28살때는 그의 부모님이 죽었고, 그로인해 마히비라는 모든것과 모든 사람들을 저버리게 되었다.

마히비라는 그의 형을 기쁘게 하기 위해 30살까지 형 집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그가 형 집에서 사는 2년동안 마히비라는 자기 수양에 힘썼으며, 금은보화를 거지들에게 나눠주었다.

마히비라가 30살이 되어 형 집을 떠날때, 그는 모든 재산과 부, 기쁨을 포기하고 떠났다. 그곳을 떠나 단식과 단음(물을 안먹음)을 하며 명상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의 모든 머리를 자르고 벌거벗은 채로 어깨에 작은 천 몇 조각만을 걸친 채 거리를 횡보했다. 한 마디로 그는 집없는 부랑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이나교를 가르치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드하마 마히비라는 자이나교의 24번째 Tirthankara(Ford-Maker)(성인(聖人)을 칭하는 단어인듯)가 되었다.

마히비라는 벌거벗은 채로 북인도 여러 지역을 설교와 복음을 전하며 돌아다녔다. 그때 그가 돌아다닌 지역은 비하르, 서부 벵갈지역, 서부 우따 쁘라데시 지방이다. 그는 여러 사람들은 감복시켰는데, 왕, 왕비,부자, 거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었다.

마히비라는 그가 죽을 때 까지 '올바른 행동에는 다섯 가지 위대한 조약이 있다.'고 가르치며 살았다. 그 중 네 가지는 그의 이전 스승인 빠르쉬바(Parchva)의 것이었고, 다섯 번째 조약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다.
그 조약들을 살펴보자면,

Asteya : 그 누구의 물건도 훔치지 마라.
Satya :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Aparigrapha : 어느 누구도 재산을 갖지 마라.(무소유주의)
Ahimsa : 살아있는 생명체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마라.
Brahmacarya : 완전한 독신 생활을 하라.

이다.

그의 스승인 빠르쉬바는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옷을 입도록 냅뒀지만, 마히비라는 그들이 그 어떤 옷을 입기도 원치 않았다. 마히비라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 매우 신념이 강했다. 그리고 그 조약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실천은 마히비라가 해충들이 그의 몸에 살도록 냅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 번째 조약(Ahimsa)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몸을 해충들에게 방치했으며 모든 고통을 견뎌냈다.

"마히비라는 종교적(신적) 실천에 대한 73가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수용하고 공부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쳤죠. 그리고 그로 인해 완벽함과 계몽, 구원, 극락, 그리고 모든 고통의 종결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자이나교 조약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갔으니 말이다.

마하비라가 그를 포함한 사람들을 위해서 추구했던 것은 최종적으로 열반(니르바나)와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다. 니르바나란 탄생과 죽음,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모든 것을 초월해서 더 없이 행복한 상태를 뜻한다. 마하비라와 그의 추종자들의 최종 목적은 바로 업보에서 독립되는 것이었다. 마하비라는 그가 자이나교 생활을 시작한지 13년째 이르던 해, 단식과 단음(물을 안먹는 것), 명상을 하며 이틀 째 열반에 이르렀다. 다만 마하비라만이 열반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열반 말고도 Kevala에 이르렀다. Kevala란 완전한 지식과 궁극의 깨달음을 뜻한다.

마하비라는 기원전 527년에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Siddha가 되었으며, 다신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결국 업보를 극복했으며 다시는 지구에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그의 영혼을 구원하게 된다.




(원문)
Vardhamma Mahavira was not the founder of Jainism, but he reformed and refined previous teachings of the Jaina tradition. Mahavira was born in 599 BC in Kaundinyapura near modern Patna. Scholars debate the birth date and place. Some claim it to be as late as 490 BC in Kundapura near Vaishali or in Vaishali, which is in present day Bihar. Mahavira was born to a high-ranking family and received an education fit for a nobleman. He learned about literature, art, philosophy, and military and administrative sciences. Mahavira married a princess named Yasoda and had a daughter named Anojja. When Mahavira was 28, his parents died, and Mahavira wanted to abandon everything and everyone.

To please his brother, Mahavira decided to stay at his home until the age of 30. For those two years, Mahavira practiced self-discipline and gave up luxuries by giving charity to beggars.

When Mahavira left his family at the age of 30, he also gave up all property, wealth, and pleasures. He left his home and mediated, fasted, and went without water. After all this, Mahavira tore out his hair and wandered naked with a piece of cloth on his shoulder. Mahavira essentially became a homeless man. This did not bother Mahavira, because he was going to teach the Jain Religion. Vardhamma Mahavira became the 24th Tirthankara or "ford-maker" of the Jain or Jaina Religion.

Mahavira traveled naked to various parts of northern India, teaching and preaching. These parts included Bihar, western Bengal, and western Uttar Pradesh. Mahavira attracted all kinds of people, including kings, queens, rich, poor and both men and women.

Mahavira taught that the center of right conduct was the five great vows of which he preached until his death. Four were from the previous teacher Parshva, and the fifth was his own. The vows were (asteya) to not take anyone's private possessions, (satya) to always tell the truth, (aparigraha) to not own any property, (ahimsa) to not injure or annoy any living thing, and (brahmacarya) to have complete celibacy. Parshva let his followers wear clothing, but Mahavira did not want his followers to wear any. In this, Mahavira was very faithful to his teachings. The most noticeable extent of these vows was that Mahavira let vermin inhabit his body, because it was wrong to kill any living creature. Mahavira vowed to neglect his body and agreed to suffer all things that could happen. "Mahavira taught 73 methods for exertion in goodness by which many creatures, who believed in and accepted them, studied, learned, understood, and practiced them, and acted according to them, obtained perfection, enlightenment, deliverance, beatitude, and an end to all misery". This was the very extreme form of the vow. He gave up all he had and was celibate.

Mahavira's quest, for himself and others, was to finally reach nirvana or salvation. Nirvana is the attainment of the blissful state of one's self and of total freedom from the cycle of birth, death, life, pain, and misery. The final step for Mahavira and all that follow him was the final removal of the karma or self. Mahavira attained nirvana the 13th year of his new Jain life. This happened while he was fasting, not drinking water for two days, and meditating. Not only did Mahavira attain nirvana but he also attained kevala. Kevala is the absolute knowledge and is the highest awareness.

Vardhamma Mahavira finally died in 527 BC at the age of 72. Mahavira is believed to have become Siddha, never to go through the cycle of birth and death. Mahavira was able to rid himself of karma by destroying it and won his soul's salvation by never returning to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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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김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