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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8일 수요일

B.C.30. 사트바하나 왕조의 부상(Rise of the Satvahana Dynasty)(영어+번역)

 사트바하나(Satvahana) 왕국


안드라스의 사트바하나 왕국 건설
마우리아 왕국이 몰락하고 사트바하나(Satvahanas)는 데칸(Deccan)지방에 새로운 왕국을 새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안드라스(Andhras)라고도 알려진다. 그들은 처음에 고다바리(Godavari)기슭의 마하라쉬트라(Maharashtra)에서 힘을 모았다. 사트바하나의 시조는 시무카(Simuka)였지만, 사트바한 왕국을 번성시킨 왕은 사타카르니 1세(Satakarni 1) 이었다. 기원전 30~40년쯤 부터 서기 300년 정도 까지 사트바하나 왕국은 인도지역을 다스렸다.

사타카르니 1세는 당시 강성했던 마라띠(Marathi) 왕국의 우두머리와 동맹을 맺고, 말의 목을 자르는 아쉬바메다스(ashvamedhas)라는 의식을 통해 그의 권력을 사방에 알렸다. 그가 죽은 후, 시띠안(Scythian)족의 침략과 함께 사트바하나 왕국은 점점 몰락하게 된다.






서기 80-104년. 가우타미뿌뜨라(Gautamiputra) 왕의 집권

사트바하나 왕국 영토
가우타미뿌뜨라 사타카르나(Gautamiputra Satakarni)는 사트바하나 왕조의 유명한 왕 중에 하나이다. 그는 사카스(Sakas)(Sycthians)과 야바나스(그리스), 그리고 파라바스(Parithans)를 물리쳤다. 그는 당시 영토를 남쪽의 바나바시(Banavasi)부터 마하라쉬트라(Maharashtra), 콘칸(Konkan), 사우라쉬트라(Saurashtra), 말와(Malwa),를 거쳐 서쪽의 라자스탄(Rajasthan),과 비다르바(Vidharbha).까지 확장했었다. 그의 아들, 바시스티뿌뜨라(Vasishtiputra)는 고다바리 기슭의 파이싼(Paithan) 지역을 다스렸다.

바짜얀티(북쪽 깐나라지방)과 암라바띠(군투르 지역), 이 두 도시는 사트바하나 왕조의 가장 큰 도시들이었다. 가우타미뿌뜨라 이후의 왕들은, 많은 영토를 외세에 빼앗겼지만, 스리 야즈나 사타카르니(Sri Yajna Satakarni)왕(사트바하나 왕조의 위대했던 마지막 왕)이 다시 집권을 하면서 사트바하나 왕국의 힘은 재정비됐다. 그 이후 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몇몇 학자들은 사트바하나 왕국에는 총 19명의 왕들이 있었고, 그들이 300년동안 지배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학자들은 30명의 왕들이 456년간 지배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사트바하나 왕조는 3세기 중간에 와서 붕괴가 되고 만다.(확실한 것은 서기 220년 이후라는 것이다.) 왕조 붕괴 후 왕국은 많은 주들로 쪼개지게 되고, 아브히라스, 추투스, 아크쉬바쿠스, 팔라바스 등에 의해 지배되게 된다.



다음은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에서 사트바하나 왕조에 대해 발췌한 내용들입니다.


행정

사트바하나 왕국은 아하라스(aharas)라고 불리는 지역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트야(amatya) 혹은 지역 장관에 의해 다스려졌다. 사트바하나에는 거대한 군사 조직이 있었다. 여자들은 사회 생활에서 남자보다 뛰어났으며, 재산을 소유하고 각종 집회에 참여하였다.


종교

사트바하나의 지배자들은 브라만(Brahmins)이라고 알려진다. 그들은 크리쉬나(Krishna), 바수데바(Vasudeva), 그리고 다른 바쉬나바(Vaishnava)의 신들을 숭배했다. 불교 또한 번창하였었는데, 당시 지배자들은 브라만과 불교 수도승들을 위해 땅을 기부했었다.


건축과 예술

많은 불교 기도/수도원들은 바위조각으로 치장돼있었다. 마하라쉬트라 지방의 칼레(Karle)에 가면 가장 유명한 기도원중의 하나를 볼 수가 있다. 사트바하나 왕조때는 책이나 화폐를 주조할 때, 산스크리트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프라틱(Pratik)을 사용했었다.


사트바하나 왕국 동전

사트바하나 왕국 조각




(원문)

The Satvahana Dynasty

After the decline of the Mauryan empire the Satvahanas established their kingdom in the Deccan. They were also known as Andhras. They first rose to power in present Maharashtra on the banks of the Godavari. The founder of the Satvahanas was Simuka. But the man who raised it to eminence was Satakarni I. The Satvahana dynasty began its rule in about 40 or 30 BC, and continued until the 3rd century AD.

Satakarni I allied with powerful Marathi chieftain and signalled his accession to power by performing ashvamedhas (horse-sacrifice). After his death, the Satvahana power seemed to have been submerged beneath a wave of Scythian invasion.


AD 80-104: Reign of Gautamiputra

Gautamiputra Satakarni was the famous king during the Satvahana dynasty. He defeated the Sakas (Scythians), Yavanas (Greeks) and Pahlavas (Parithans). His empire extended upto Banavasi in the south, and included Maharashtra, Konkan, Saurashtra, Malwa, west Rajasthan and Vidharbha. His son, Vasishtiputra, ruled at Paithan on the banks of Godavari.

Two other cities, Vaijayanti (in North Kanara) and Amravati (in the Guntur district), attained eminence during the Satvahana period. Kings succeeding Gautamiputra lost many of their territories. But the power of Satvahanas revived under Sri Yajna Satakarni, who was the last great king. After him, the empire began to decline.

Some scholars say the there were 19 kings of this dynasty which ruled for 300 years, while others say there were 30 kings who ruled for 456 years. The dynasty came to an end about the middle of the third century AD. (after AD 220). Their empire broke up into small states ruled by the Abhiras, Chutus, Ikshvakus, Pallavas.



Extract from the book A History of India for Children


Administration

The Satvahana empire was divided into provinces called aharas, each under an amatya or minister. They had a large army. Women were prominent in social life, owned property and took part in assemblies.

Religion

The Satvahana rulers were said to be Brahmins. They worshiped Krishna, Vasudeva and other Vaishnava gods. But Buddhism also flourished. They gifted land to Brahmins and Buddhist monks.

Architecture and art

Many Buddhist chaityas (prayer halls) and viharas (monasteries) were carved out of solid rocks. The most famous chaitya is at Karle, in Maharashtra. The Satvahanas used Pratik, a form of Sanskrit, for their inscription and books.


Copyright : IndHistory.com
번역 : 김태훈


고위/최고, 우두머리, 접근, 가라앉다

2012년 4월 13일 금요일

B.C. 180 마우리아 왕조의 몰락과 숭가 왕조의 등장(Fall of the Mauryas & Rise of the Sungas)(영어+번역)

마우리아 왕조의 몰락

아쇼카 왕은 37년동안 마우리아 왕국을 통치하다가 기원전 232년에 죽었다.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왕국내에 평화를 전파하는 데 힘썼었다. 아쇼카가 죽은 후 7명(혹자는 10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의 왕이 50년간 마우리아 왕국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결국 마우리아 왕국은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왕국의 몰락을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아쇼카왕 지배 당시 전쟁을 지양했던 정책이 군대를 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며, 또 한쪽에서는 아쇼카 왕이 죽은 이후 왕들이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기엔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우리아 왕국 시민들의 생활
(Roshan Dalal의 "A History of India for Children"에서 참조)

마우리아 왕조때 많은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그들은 쌀, 밀가루, 보리, 면, 야채 등을 재배했다. 그리고 이외의 사람들은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마우리아 전기 때 활발하게 활동했고, 각기 다른분야에 있어 매우 전문적이었다. 예를 들면 직물, 나무, 상아 장식물, 또는 향수, 질좋은 돌을 이용한 보석세공, 철/구리 세공품, 빛나는 검은색 주전자 등이 그들이 만들었던 물건들이다. 각종 거래꾼과 상인들은 땅/바다 가릴 것 없이 왕성하게 물건들을 팔며 다녔다. 군인들은 왕국을 지켰으며 수상과 공무원들은 왕을 보좌했다. 철학자와 종교 관련 종사자들은 왕국을 돌아다니며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 그리고 삶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기둥조각
마우리아 왕조의 사람 얼굴 조각



숭가(Sungas) 왕조

마우리아 왕조의 마지막 왕은 브리따드라따(Brithadratha)였다. 그는 기원전 185년, 당시 최고사령관이었던 푸쉬야미트라 숭가(Pushyamitra Sunga)에게 죽음을 당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몰락과 함께 인도는 정치적 결합력을 잃게 된다. 그리고 푸쉬야미트라 숭가는 마가다(Magadha)와 주변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하게 된다. 안타까운 사실은 숭가가 새로운 왕국을 새우면서 라즈푸타나(Rajputana), 말와(Malwa), 펀잡(Punjab) 등의 인도의 북서부지역은 외국의 왕들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대신 숭가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나르마다(Narmada)지역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자란다르(Jalandhar)와 시아코트(Siakot)(펀잡 내 지역)등의 북서부 지역도 점령하여 지배하게 된다.

푸쉬야미트라 숭가는 기원전 187년부터 151년까지 36년을 지배한 후 죽었다. 그의 왕위를 이은 사람은 바로 그의 아들이었던 아그니미트라(Agnimitra). 이 왕자는 인도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인 칼리다사(Kalidasa)의 연극에 등장하는 영웅이기도 하다.
아그니미트라는 비디사(Vidisa)와 동부 말와(Malwa)지역의 신 베스나가르(Modern Besnagar)에서 새로운 궁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질없게도 숭가(Sungas) 왕조의 힘은 결국 약해졌으며 숭가 왕조때 총 10명의 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숭가 왕국 시대의 인도 정세



칸바(Kanva) 왕조(기원전 75년 ~ 기원전 30년)


기원전 75년, 숭가 왕조의 마지막 왕은 칸바 왕조의 바수데바(Vasudeva)에게 밀려나게 된다. 바수데바는 숭가 왕조로 하여금 그들이 전에 지배하던 지역의 변두리에 대한 모호한 통치권을 보장해주었다.(아무튼 칸바와 숭가는 공존했던 셈이다 - 번역자 주) 그리고 마가다(Magadha)에서 4명의 왕들이 차례로 지배를 하게 된다.
기원전 30년, 서구 세력들이 몰아닥치면서 칸바스 왕조와 숭가 왕조가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동부 말와(Malwa)지역은 새로운 서구 지배자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원문)
Fall of Mauryas

Emperor Ashoka ruled for 37 years. He died in 232 BC. During his reign he gave up war and preached peace in the kingdom. Seven kings (some say 10) followed Ashoka within a period of 50 years. The Mauryan empire was breaking up. There are different opinions about the fall of the kingdom. Some say that since the later part of Ashoka's reign was devoid of wars, the military were inactive and this weakened them. Others say after Ashoka there were no strong kings to rule such a vast empire.

Life of People in Mauryan Empire

Extract from "A History of India for Children" by Roshan Dalal:

Many people were agriculturists. They grew rice, wheat, barley, pulses, cotton and vegetables. Others were artisans. They specialised in different crafts, as in the earlier period. Textiles, wooden, and ivory objects, perfumes, jewellery from semi-precious stones, items of iron and copper and the shining black pottery described earlier, were among the things they made. Traders and merchants carried goods to far-off places by land and sea. Soldiers defended the kingdom. Ministers and officials helped the king. Philosophers and religious people wandered through the kingdom in search of the truth about life and death, and why life existed.



Sungas Dynasty

The last ruler of the Mauryan dynasty was Brithadratha. He was killed by his own commander-in-chief Pushyamitra Sunga in 185 BC.

With the fall of Mauryas, India lost its political unity. Pushyamitra Sunga became the ruler of the Magadha and neighbouring territories. The north-western regions comprising Rajputana, Malwa and Punjab passed into the hands of the foreign rulers. The kingdom of Pushyamitra was extended upto Narmada in the south, and controlled Jalandhar and Sialkot in the Punjab in the north-western regions.

Pushyamitra died after ruling for 36 years (187-151 BC). He was succeeded by son Agnimitra. This prince is the hero of a famous drama by India's greatest playwright, Kalidasa. Agnimitra used to hold his court in the city of Vidisa, modern Besnagar in Eastern Malwa. The power of the Sungas gradually weakened. It is said that there were ten Sunga kings.


Kanva Dynasty (75BC - 30BC)

The last ruler of the Sunga dynasty was overthrown by Vasudeva of the Kanva dynasty in 75 BC. The Kanva ruler allowed the kings of the Sunga dynasty to continue to rule in obscurity in a corner of their former dominions. Magadha was ruled by four Kanva rulers. In 30 BC, the southern power swept away both the Kanvas and Sungas and the province of Eastern Malwa was absorbed within the dominions of the conqueror.


Copyright : Indhistory.com
번역 : 김태훈


~가 결여된, 보리, 기술, 상아, 최고사령관, 통치권(관할)

2012년 4월 12일 목요일

B.C. 272. 아쇼카 왕(Ashoka's Reign)(영어+번역)

 기원전 273년 ~ 232년

아쇼카(Ashoka)

아쇼카(Ashoka)는 빈두사라(Bindusara)왕의 가장 촉망받는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용감한 전사이기도 했다. 아쇼카는 마우리아 왕조의 모든 왕들중에 제일 유명하며, 인도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들 중 한명이다. 그의 아버지, 빈두사라왕이 통치하더너 시절, 아쇼카는 우짜인(Ujjain)과 타씰라(Taxila) 지방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형들은 유망했던 아쇼카가 왕을 이어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지만, 결국 아쇼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마우리아 왕국을 극남지방과 남동부지역을 제외한 거의 전 인도 지역 및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하게 된다.


기원전 261년, 칼링가(Kalinga) 전쟁

아쇼카왕의 상징, 4두사자상

아쇼카는 칼링가 지역을 지배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에 대해서 엄청난 희생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거의 10만명이 죽었고 15만명이 부상당했으며, 수천명이 포로로 잡혀 칼링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영토 확장과 정복 과정에서 많은 살육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아쇼카는 많은 고뇌와 심정의 변화를 느꼈다. 그리고 이것은 아쇼카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는 전쟁을 지양하고 부처의 가르침(사랑)과 아힘사(Ahimsa)(비폭력)(이것은 간디의 핵심 사상 이기도 하다 - 번역자 주)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은 그에게 더이상 폭력과 증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짐승을 사냥하거나 도살하는 것 또한 중단했고, 매우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의 변화 아래서, 불교는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중앙아시아, 버마 등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그리고 불교의 원활한 포교를 위해서, 사람이 많이 볼 수 있는 바위나 건물 기둥에 불교 경전을 새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 후 2000년간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전파하고 있다. 이 때 당시 새겨진 바위나 기둥들은 지금도 인도에서 발견이 된다. 아쇼카는 그의 이러한 사상에 대해 다르마(Dharma)라는 이름을 지었다.

아쇼카는 기원전 232년 죽었다. 사르나쓰(Sarnath)에 있는 아쇼카의 기둥 머리글자는 인도의 국가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기둥에 새겨져 있던 "다르마 차크라(Dharma Chakra)"는 인도의 국기에도 들어가 있다.

가운데 있는 차크라 문양이 아쇼카 왕의
불교사상을 의미한다. 원래 삼색국기였다가
간디의 주장으로 문양이 새겨짐





(원문)
273 BC: Ashoka coronated as Mauryan king

[273 BC - 232 BC]
Ashoka, the most trusted son of Bindusara and the grandson of Chandragupta Maurya, was a brave soldier. He was the most famous of the Mauryan kings and was one of the greatest rulers of India. During his father's reign, he was the governor of Ujjain and Taxila. Having sidelined all claims to the throne from his brothers, Ashoka was coronated as an emperor. Ashoka extended the Maurya Empire to the whole of India except the deep south and the south-east, reaching out even into Central Asia.


261 BC: The Kalinga War

Ashoka succeeded in conquering Kalinga after a bloody war in which 100,000 men were killed, 150,000 injured and thousands were captured and retained as slaves. The sight of the slaughter involved in his conquest deeply distressed Ashoka and deeply affected his mind. This was a turning point in his life. He renounced war and sought peace in Buddha's preachings of love and ahimsa (non-violence). The war also developed in him a hatred for all kinds of violence. So he gave up hunting and slaughtering of animals. He became a strict vegetarian.


Under his reign Buddhism spread to Syria, Egypt, Macedonia, Central Asia, Burma. For propagation of Buddhism, he started inscribing edicts on rocks and pillars at places where people could easily read them. These pillars and rocks are still found in India, spreading their message of love and peace for the last two thousand years. To his ideas he gave the name Dharma. Ashoka died in 232 BC. The capital of Ashoka pillar at Sarnath is adopted by India as its national emblem. The "Dharma Chakra" on the Ashoka Pillar adorns our National Flag.


Copyright : indhistory.com
번역 : 김태훈


훼방을 놓다, 보류하다, 도살, 비탄하게하다, 증오, 포교, 새기다, 칙령

B.C.298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의 집권(Bindusara Coronated)(영어+번역)

기원전 298년 ~ 273년

Bandusara
찬드라굽타는 25년간의 통치 이후 그의 아들 빈두사라(Bindusara)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기 자신은 자이나교의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빈두사라는 힌두쿠시(Hindukush), 나마다(Narmada), 빈디야스(Vindhyas), 마이소르(Mysore), 비하르(Bihar), 벵갈(Bengal), 오리싸(Orissa), 아쌈(Assam), 발루치스탄(Baluchistan), 그리고 아프가니스탄(Agrhanistan)에 이르는 마우리아 왕조의 영토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는 그리스 작가들로부터 '적군 학살자'라는 뜻의 아미트라가타(Amitraghata)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빈두사라의 왕국

빈두사라는 집권 이후 남부 마이소르까지 영토를 확장하게된다. 그는 16개의 주를 정복해나가며 광대한 영토를 만들어나갔다. 그 때 당시 마우리아 왕조의 영토는 인도에서 칼링가(Kalinga) - (현대의 오리싸지역)와 남부의 드라비디안(Dravidian) 왕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이르렀다. 콜라스(Cholas), 판디야스(Pandyas), 체라스(Cheras) 시절, 드라비디안 왕국은 마우리아 왕국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빈두사라는 굳이 드라비디안을 정복할 필요성을 못느꼈다. 그러나 왕이 바뀌고 칼링가(Kalinga)가 드라비디안 왕국을 다스리게 되면서 마우리아 왕조에게 더이상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게 되고, 빈두사라왕의 아들, 아쇼카가 집권하면서 두 왕국은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반두사라 집권 당시 마우리아 영토



빈두사라 집권당시의 행정

빈두사라는 셀루서스 니카토르(Selucus Nicator)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주기적으로 외교 사절단과 선물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는 셀루서스의 아버지에 의해 세워진 서부 헬레닉(Hellenic West)지역과도 친선을 유지했다. 당시 빈두사라의 궁정에는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온 각종 사절단들이 머물렀다. 그리고 빈두사라는 자이나교보다는 아이비카교(Aiivika)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원문)
298 BC: Bindusara becomes the new king of Mauryan Empire

[298 BC - 273 BC]
After ruling for about twenty five years, Chandragupta left his throne to his son Bindusara and became a Jain ascetic. Bindusara inherited an empire including the Hindukush, Narmada, Vindhyas, Mysore, Bihar, Bengal, Orissa, Assam, Baluchistan & Afghanistan. He was called Amitraghata which means "slayer of foes" by Greek writers.

Bindusara's Empire

Bindusara extended his empire further as far as south Mysore. He conquered sixteen states and extended the empire from sea to sea. The empire included the whole of India except the region of Kalinga (modern Orissa) and the Dravidian kingdoms of the south. The Dravidians kingdoms of the Cholas, Pandyas and Cheras were very friendly with the Mauryan empire and so the king felt no need to conquer them. However, Kalinga was not friendly with the Mauryans and so a war was fought between the people of Kalinga and Mauryans led by Bindusara's son Ashoka.


Administration during Bindusara's Reign

Bindusara maintained good relations with Selucus Nicator and the emperors regularly exchanged ambassadors and presents. He also maintained the friendly relations with the Hellenic West established by his father. Ambassadors from Syria and Egypt lived at Bindusara's court. He preferred the Ajivika philosophy rather than Jainism.


Copyright : IndHistory.com
번역 : 김태훈


수행자/고행자

2012년 4월 6일 금요일

PMI (Purchase Management Index)를 파헤쳐보자



PMI(Purchase Management's Index)는 Markit Group이 발명한 경제 예측 지수이다.
이것은 오로지 사적 부문만 반영을 하며 공적부문에 대해서는 반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조업체들에서 물건 매매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경기를 예측할때 유용하게 쓰인다.

기본적으로 PMI는 실무자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도출되며 계산 방식또한 간단하다.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그냥 PMI지수가 언제 발표되고 어떻게 수정되었고 이런 개괄적인 내용이라서 굳이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정말 중요한 것, '어떻게 PMI 지수를 산출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PMI의 산출 공식은 다음과 같다.



PMI INDEX = (P1*1) + (P2*0.5) + (P3*0)


P1 = 경제가 오를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의 %
P2 = 경제가 오르지도,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의 %
P3 = 경제가 떨어질 것이라 대답한 사람의 %

생각해보자.

Case 1)
100명을 설문조사를 했다. 여기서 100명 모두가 경제가 오를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P1은 100, 나머지 P2와 P3는 0이 되면서 PMI는 100이 나온다.

Case 2)
100명 중에 50명은 경제가 오른다, 50명은 경제가 내린다고 대답한다면?
P1 = 50, P2 = 0, P3 = 50으로 PMI는 50이 나온다.

Case 3)
100명중에 40명은 경제가 오를 것이다, 30명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20명은 경제가 내릴 것이다 라고 대답한다면?
P1 = 40, P2 = 30, P3 = 20으로 PMI는 55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 지수의 재밌는 점이 이것이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중을 양수 0.5로 뒀기 때문이다.
100명 모두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PMI는 50이 나온다.
이것은 50명이 오를것이다라고 대답하고, 50명이 내릴 것이다라고 대답한 결과와 같다.

그래서 PMI의 기준값은 50이 된다.
50을 기준으로 PMI가 50보다 크면 경제 전망이 좋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50을 기준으로 PMI가 50보다 낮으면 경제 전망이 안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P2의 가중치를 0.5로 둠에 따라 PMI의 신뢰도는 50근처보다는 양극단에 가까워질수록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즉, 50근처에서는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경제 예측 지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위키피디아 원문)
The Purchasing Managers' Index (PMI) is an indicator produced by Markit Group and the Institute for Supply Management of financial activity reflecting purchasing managers' acquisition of goods and services.[1][2]
Markit Group and the Institute for Supply Management compile The Purchasing Managers' Index (PMI) surveys on a monthly basis by polling businesses that represent the make up of the respective sector. The surveys cover private sector companies, but not the public sector.
The current Purchasing Managers' Index (PMI) survey can be found under "ISM Reports On Business" on the ISM home page, or directly on this page. The surveys are released shortly after the end of the reference period. The actual release dates depend on the sector covered by the survey. Manufacturing data are generally released on the 1st working day of the month, followed by construction on the 2nd working day and services on the 3rd working day.[3]
The Institute for Supply Management in Tempe, Arizona.(ISM) began to produce the report for the US in 1948.The data for the index are collected through a survey of 400 purchasing managers in the manufacturing sector on five different fields, namely, production level, new orders from customers, speed of supplier deliveries, inventories and employment level. Respondents can report either better, same or worse conditions than previous months. For all these fields the percentage of respondents that reported better conditions than the previous months is calculated. The five percentages are multiplied by a weighing factor (the factors adding to 1) and are added.[4]
The Chicago-PMI survey registers manufacturing and non-manufacturing activity in the Chicago region. Investors care about this indicator because the Chicago region somewhat mirrors the nation in its distribution of manufacturing and non-manufacturing activity.
The predominant operator and owner of the Purchasing Managers Index (PMI) series outside the US is the Markit Group[4]
The Markit and ISM Purchasing Managers Indices include additional sub indices for manufacturing surveys such as new orders, employment, exports, stocks of raw materials and finished goods, prices of inputs and finished goods.[4]
Other similar purchasing managers indices are operated by the IFO in Germany, The Bank of Japan in Japan (tankan) and the China PMI operated by the Chinese Government.[citation needed]




Formula and calculation

PMI data are presented in the form of diffusion indexes and are calculated as follows:[4]
INDEX = (P1*1) + (P2*0.5) + (P3*0)
P1 = Percentage number of answers that reported an improvement.
P2 = Percentage number of answers that reported no change.
P3 = Percentage number of answers that reported a deterioration.
Thus, if 100% of the panel reported an improvement the index would be 100.0. If 100% reported a deterioration the index would be zero. If 100% of the panel saw no change the index would be 50.0 (P2 * 0.5).
Therefore, an index reading of 50.0 means that the variable is unchanged, a number over 50.0 indicates an improvement while anything below 50.0 suggests a decline. The further away from 50.0 the index is, the stronger the change over the month. E.g. a reading of 55.0 points to a stronger increase in a variable than a reading of 52.5.[4]


원문 출처 : 위키피디아

2012년 4월 5일 목요일

인도와 중국, 유로존 위기로 인해 성장 둔화(India, China slow down as euro zone slips into recession)


유로존 위기가 아직 해결되진 않은 모양이다.
작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특히 1,2월 잠깐 반등하는가 싶더니 3월엔 다시 분위기가 우울하다.
미국은 구체적인 경기 부양책을 마련하는데 골머리를 썩고 있으며, 유럽과 중국, 인도 모두 경제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유럽 전반의 PMI지수는 지난달에 비해 떨어졌으며, 경기가 수축국면으로 다시 들어가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긴다.
하지만 일부 측에서는 이것이 단지 순간적인 수축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기업 신용과 서비스 부문의 활기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우울한 것은 아니다. 영국은 이 와중에도 PMI 가 55포인트대로 들어섰다. 지난 2월에 비해 2포인트 가량 오른 수치이다.
반면 인도는 올해들어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며 경기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 또한 PMI지수가 크게 떨어졌다.
앞으로 전세계 경제는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다.



(원문)
The euro zone's services business remains mired in a mild recession but activity is perking up in Britain and is more robust in Asia, according to data on Wednesday that underscored widening fault lines in a plodding global economy.

Sagging orders kept euro zone businesses in the doldrums in March, although companies became more confident that better times lie ahead, a survey showed. That contrasted with evidence of a slowdown in India and wilting business confidence.

The uneven data come a day after markets were jolted by news that the US Federal Reserve, while guarded on the clearly brighter economic prospects there, looks far from considering any more stimulus for the world's largest economy.

Given that there are no concrete plans to stimulate growth in debt-ridden Europe, the onus remains firmly on developing nations such as China and India, which are slowing, to carry world economic growth. Markit's Eurozone Composite Purchasing Managers Index (PMI), which gauges how thousands of companies - from banks to hairdressers and restaurants - fare each month, edged down to 49.1 in March from 49.3 in February, slipping further below the 50 mark that divides growth from contraction.

Although that was better than a preliminary reading of 48.7, survey compiler Markit said it probably consigned the euro zone to recession, defined as two consecutive quarters of contraction in gross domestic product.

"(It) suggests that the first quarter of 2012 was not as bad as the final quarter of 2011, but the last two months of surveys have been well below the upturn promised in January," said economists Janet Henry, European economist at HSBC.

"The strength of service sector business confidence raises hope for a future recovery."

The services PMI, measuring the fortunes of the services sector was a little less gloomy than originally portrayed, rising to 49.2 from 48.8 in February, a substantial upwards revision from the 48.7 flash reading for March.

However, Europe's problems look far from over. Spanish borrowing costs jumped at a bond auction on Wednesday, jolting wider European markets, as this week's tough budget failed to calm investors' nerves about the country's finances. New business levels continued to shrink and at a faster pace last month, which does not bode well for April, although services firms sounded more upbeat about the future, with business expectations at an eight-month high.

"With business confidence in the service sector running at a far higher level than late last year, the recession may also be brief," said Chris Williamson, Markit's chief economist.

That coincided with a new tranche of three-year loans given to banks by the European Central Bank in February, worth more than half a trillion euros. But some euro zone countries are clearly doing better than others. Activity held essentially unchanged in France, while it picked up slightly in Germany. And the downturn in Spanish services activity, while still worrying, unexpectedly eased.

"The downturn is currently only very mild ... with gross domestic product probably falling by just 0.2% in the first quarter," said Markit's Williamson, speaking about overall euro zone growth. That tallies with a Reuters poll of economists taken two weeks ago, which projected the euro zone economy would stagnate in the second quarter. Employment in the services sector fell across the region for a third month, although Germany bucked that trend by posting its best upturn in jobs in the year to date, Markit said.

UK and India

The UK services PMI, by contrast, taken together with manufacturing data earlier this week that also showed a better performance than the euro zone, suggested Britain's economy expanded by 0.5% in the first quarter, Markit said.

The Markit/CIPS services survey rose to 55.3 in March, well above 53.8 in February, confounding expectations for a decline to 53.4. In India, a comparable report showed services growth slipped to a five-month low in March as business confidence faded to its weakest since 2009. The HSBC Markit Business Activity index fell sharply to 52.3 in March from 56.5 the previous month. Growth of new business, which had powered the modest rise in activity until now.



Published: Wednesday, Apr 4, 2012, 16:42 IST
By Andy Bruce | Place: London | Agency: Reuters



늪에 빠지다, 생기를 불어넣다, 터벅터벅 걷는/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축 늘어지다, 우울/의기소침, 시들다, 요동치다/덜컹거리다, 짐/부담, 수축, 건네주다/위임하다, 계산/장부, 썪다,

B.C.322 마우리아 왕조의 등장과 찬드라굽타의 인도 통일(Rise of the Mauryas, Chandragupta)(영어+번역)


기원전 322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인도 통일




[기원전 322-298년]


첫 번째 인도 왕국의 탄생

찬드라굽타
찬드라굽타(Chandragupta)는 인도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리는 차나키아(Chanakya)에게 사사를 받았다. 그리고 마가다(Magadha)의 난다(Nanda) 통치자들을 물리치고 그 곳에 마우리아(Mauryan) 제국을 세우게 된다. 차나키아와 찬드라굽타는 빈디야(Vindhya) 숲에서, 난다국의 왕을 물리친 후 만났다고 전해진다.

앞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알렉산더의 침략으로 인해 인도는 중앙집권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찬드라굽타는 마우리아 제국을 세운 후 여러 나라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는 셀루써스 니카토르(Selucus Nicator)를 물리치고 마케도이나에게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 북서부 지역을 탈환한다. 그리고 차나키야의 완벽한 조언을 받으면서, 펀잡(Punjab), 카불(Kabul), 칸다하르(Khandahar), 간다라(Gandhara), 그리고 페르시아(Persia) 지방을 손에 넣게 된다. 당시 이 모든 지역들의 지배자는 셀루서스였는데, 결국 셀루서스의 딸은 찬드라굽타와 결혼하게 된다.

다음은 한 인도 역사학자의 말이다.


"셀루서스는 전쟁에서 졌고, 결국 찬드라굽타에게 항복 선언을 했어야 했죠. 그리고 그에게 엄청난 영토 또한 빼았기게 됩니다. 예를 들면 빠로파니사다이(카불지역), 아리아(Herat지역), 아라초시아(Qanadahar지역), 제드로시아(Baluchistan지역) 들이 그가 찬드라굽타에게 빼앗긴 영토들입니다. 그리고 찬드라굽타는 이러한 영토를 얻는 대가로 셀루서스에게 (겨우) 500마리의 코끼리를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이 항복 서약은 찬드라굽타와 셀루서스 딸과의 결혼으로 매우 튼튼해집니다. 당시 그리스의 사절단은 파타리푸트라(Pataliputra) 궁전에 찾아오기 시작했죠"

- An Advanced History of India
by RC Majumdar, HC Raychaudhri & Kalinkar Datta


이 조약의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찬드라 굽타의 명성이 서구 세계로 널리 뻗쳐 나가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서구열강들은 마우리아 왕조의 위대함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왕들은 마우리아 궁전으로 많은 외교 사절단들을 보내게 된다.

마우리아 왕조의 최대 영토


베일에 쌓인 찬드라굽타의 탄생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탄생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해지는 얘기가 없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그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공작 조련사에게서 길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가지 해석이 존재하며, 그 중 유력한 한 가지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난다(Nanda) 왕자와 무라(Mura)라고 불리우던 다시(Dasi)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데, 왜냐하면 찬드라굽타는 크샤트리야스(Kshatriyas)의 마우리아 부족 일원이었기 때문이다.(아마 크샤트리야스가 난다 왕과 연관이 있는것 같다.-번역자 주)


마우리아 왕국의 통치



마우리아 왕조의 번영을
보여주는 정교한 조각상
마우리아 왕국은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중앙집권화 된 강력하고 거대한 나라였다. 정부는 매우 효율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수뇌부는 잘 조절된 독재로 이루어지고, 기타 도시와 마을들은 민주주의로 다스려졌다. 파타리푸트라(Pataliputra)에 있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궁정에 머물던 그리스의 사절,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는 마우리아 궁정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Indica'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는 로마와 그리스의 많은 여행자들의 여행담이 실려 있으며, 마가스테네스 자신도 당시 마우리아 도시들이 얼마나 번영했었는지 기술해놓고 있다.
또한 그는 책에서 마우리아 왕조의 농업과 사회 모습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그가 말하길, '마우리아 왕조의 농업은 매우 풍성했으며, 물은 넘쳐났고 땅은 비옥했다.' 고 한다. 또한 그는 '당시 인도인들은 밝고 풍부한 색감의 옷을 입었으며, 자유롭게 장신구와 보석을 착용하고 다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 사회는 수많은 종교적 지역으로 나눠져 있었고, 많은 외국인이 와서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빈두사라(Bindusara)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힌두쿠쉬(Hindukush), 나마다(Narmada), 빈디야스(Vindhyas), 마이소르(Mysore), 비하르(Bihar), 벵갈(Bengal), 오리싸(Orissa), 아쌈(Assam), 발루치스탄(Baluchistan), 그리고 아프가니스탄(Afghanista)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다.



(원문)
322 BC: Chandragupta Maurya captures Magadha


Establishes First Indian Empire


[322-298 BC]
Chandragupta, with the help Chanakya (Kautilya), who is also known as the Indian Machiavelli, destroyed the Nanda rulers of Magadha and established the Mauryan empire. It is said that Chanakya met Chandragupta in the Vindhya forest, after being insulted by the Nanda king.


Alexander's invasion prompted Indians to develop a centralised state. Chandragupta declared war and defeated Selucus Nicator, the Macedonian ruler of the Northwestern territories captured by Alexander the Great.
Along with the the astute advice of Chanakya, Chandragupta also seized Punjab, Kabul, Khandahar, Gandhara and Persia from Seluces. Seluces' daughter was married to Chandragupta.

"Selucus failed and had to conclude a treaty with Chandragupta by which he surrendered a large territory including, in the opinion of certain writers, the satrapies of Paropanisadai (Kabul), Aria (Herat), Arachosia (Qanadahar) and Gedrosia (Baluchistan), in return for 500 elephants. The treaty was probably cemented by a marriage contract. A Greek envoy was accredited to the Court of Pataliputra."

- An Advanced History of India
by RC Majumdar, HC Raychaudhri & Kalinkar Datta


The most important result of this treaty was that Chandragupta's fame spread far and wide and his empire was recognised as a great power in the western countries. The kings of Egypt and Syria sent ambassadors to the Mauryan Court


Chandragupta's birth shrouded in mystery

Chandragupta Maurya's origins were shrouded in mystery. Having been brought up by peacock tamers, he could be of low caste birth. According to other sources, Chandragupta Maurya was the son of a Nanda prince and a dasi called Mura. It is also possible that Chandragupta was of the Maurya tribe of Kshatriyas.


Mauryan Administration

Maurya empire was the first really large and powerful centralised state in India. It was very well governed, with tempered autocracy at the top and democracy at the city and village levels. Megasthenes, the Greek ambassador at the court of Chandragupta Maurya in Pataliputra, had expressed his admiration for the efficient administration of the empire. His book 'Indica' is a collection of comments of other Roman & Greek travelers, and Megasthenes wrote about the prosperity of the Mauryan cities.
He further reported that agriculture was healthy, water abundant and mineral wealth was in plenty. Speaking of the general prosperity, Megasthenes wrote, "the Indians, dressed in bright and rich colors, they liberally used ornaments and gems." He also spoke of the division of society according to occupation and the large number of religious sects and foreigners in the empire.

Chandragupta Maurya's son Bindusara became the new Mauryan Emperor by inheriting an empire including the Hindukush, Narmada, Vindhyas, Mysore, Bihar, Bengal, Orissa, Assam, Baluchistan & Afghanistan.


Copyright : IndHistory.com
번역 : 김태훈


선언하다, 빈틈없는, 조약, 파견하다, 궁정, 베일에 쌓인, 공작새 조련사, 조절된 독재

B.C. 327 알렉산더대왕의 인도 침략(The Conquests of Alexander The Great)(영어+번역)


[336 BC-323 BC]



인도에 눈독을 들이는 알렉산더

알렉산더 대왕은 유럽 동남부 지역의 마케도니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르시아 왕조를 무너뜨렸고, 아카메니안(Acharmenian) 제국까지 정복했다. 나아가 알렉산더는 당시 인도의 왕을 정복하기로 맹세했고, 그의 군대는 힌두쿠쉬(Hindukush) 산을 건너 인도로 향했다. 카불(Kabul)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그의 군대는 마사가(Massaga)와 아오르노스(Aornos)의 요새를 우선 탈환했다.
알렉산더는 저 멀리 어딘가 그리스라는 나라에서 왔다. 그리고 그 곳은 지평선 저 너머에 있다고 전해졌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가 단지 21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제룸(Jhelum)강을 건너 인도의 파우라반(Pauravan)왕을 공격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지역은 매우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파우라반 왕은 이 공격에 대해 대규모의 반격을 하기로 결심한다.


알렉산더, 파우라반 왕을 무너뜨리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는 오힌드(Ohind)지역의 정글 밀집지역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인더스 강을 건너 제룸 강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타씰라(Taxila)왕국의 암비(Ambhi)왕의 협조를 구할 수 있었으며, 그의 군대는 더욱 강해져 갔다.
이에 대해 파우라반 왕은 3만명의 군사와 말, 그리고 코끼리 부대를 준비했다. 결국 알렉산더와 파우라반의 두 대군을 제룸강에서 맞부딪히게 되고, 파우라반 왕은 격렬히 반격했으나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알렉산더, 인도를 떠나다

알렉산더는 제룸강 정복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베아스(Beas) 위쪽의 첸나브(Chenab)와 라비(Ravi) 곡창지대를 손에 넣고자 한다. 여기서 이 알렉산더의 전략은 그리스 통치자들의 고전적인 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부족과 왕들을 정복한 그는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직물, 보석, 호랑이 등등 많은 전리품을 획득 할 수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갠지스 강 지역까지 정복하려 했으나, 그의 군대는 너무 지쳐있었고,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알렉산더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제룸 강으로 돌아간다. 그 때 당시 그는 곳곳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왜냐하면 말라바스(Malavas) 부족 요새를 공격할 때 저항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고통을 참고 그는 꿋꿋이 바루치스탄(Baluchistan) 사막을 건넜고, 드디어 바빌론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원전 323년, 그가 바빌론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만다.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국경지역에서의 군림은 기원전 4세기에 들어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의 끈질긴 정치활동은 무너져가던 제국주의를 부활시켰고, 인도와 그리스의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었다. 이 와중에 인더스 강 주변을 점령하고 있던 마케도니아 왕조는 심각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양한 정치세력들을 하나로 통합시켰으며 나중에 마우리아 왕조가 인도제국을 통일하는데 커다란 초석을 제공하게 된다.







(원문)
The throne of Macedon in south-east Europe has been occupied by Alexander. Having defeated the last of the Persian rulers and conquered the Acharmenian empire, Alexander has vowed to conquer the Indian satraps. His army has crossed the Hindukush mountains and is strengthening its position near Kabul. He has captured the fortresses of Massaga and Aornos. Alexander is from a far off land called Greece. This is reportedly beyond the horizon.
The astonishing fact about this he is just 21 years old! It's known from well-placed sources that he is planning to launch a major attack on the Pauravan king across the Jhelum river. The Pauravan king is planning a massive counter attack.


Alexander defeats the Pauravan King

India, 326 BC: Alexander moves through the dense jungles of Ohind. Then, having crossed the Indus river and secured the help of the Ambhi, king of Taxila, Alexander marches on to the Jhelum. The Pauravan king with an army of 30,000 soldiers, horses and elephants provided fierce resistance but was eventually defeated.
When Alexander asked the Pauravan king to bow, the latter answered, "Act like a King". Impressed by the Pauravan king's efforts he has given him back his kingdom.


Alexander leaves India

Alexander has moved further. He concentrated on capturing the Chenab and Ravi plains upto Beas. This strategy of Alexander is typical of the great Greek rulers. Having conquered several tribes and satraps, Alexander has received many presents including brocades, gems, tigers, etc. He wanted to move further towards the Ganges valley, but has been stopped by his tired troops.

So with a heavy heart, Alexander has retraced his steps to the Jhelum. He has been severally wounded while storming one of the citadels of the powerful tribe of Malavas. Through the desserts of Baluchistan and with terrible sufferings, he has reached Babylon. And in 323 BC , not very long after his return to Babylon, Alexander dies.

"The hold of the great king [Alexander] on the Indian frontier slackened considerably in the fourth century BC. The arduous campaigns of Alexander restored the fallen fabric of imperialism and laid the foundation of a closer contact between India and the Hellenic world. The Macedonian empire in the Indus valley no doubt perished within a short time. But the Macedonian had welded the political atoms into one unit and thus paved the way for the permanent union under the Mauryas."


Copyright : IndHistory.com
번역 : 김태훈


태수, 요새,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직물, 침울하게/풀이 죽어서, 발길을돌리다, 약해지다, 끈질긴/힘겨운, 구조/직물, 용접하다/하나로 합치다

2012년 4월 4일 수요일

마하트마 간디 5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간디는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을 인도의 수도였던 델리에서 보냈다. 거기서 그는 꾸준히 반기 부락(Bhangi Colony)를 방문하였었다. 반기 부락은 당시 수많은 청소부들과 최하위 천민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비를라 하우스(Birla House)도 방문하였다. 그곳은 간디의 아쉬람(힌두교의 거처를 뜻함 - 번역자 주)에게 큰 공헌을 하던 한 인도 갑부의 집이었다.

당시 힌두와 시크교도 난민들은 파키스탄 지역에서 델리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분노와 무슬림에 대한 폭력이 발생했다. 당시 그 폭동으로 인해 거의 100만명이 목숨을 잃고 1100만명이 집을 잃었다. 그래서 간디는 위와 같은 활동을 하면서 델리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폭동을 막으려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죽음의 단식을 마지막으로 하기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간디의 이러한 마지막 단식을 걱정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이해집단의 대표들이 그들의 싸움을 중단하고 무슬림에 대한 생명과 재산, 믿음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서에 서명을 하게 되고, 결국 간디의 단식 또한 중단되게 된다.

그로부터 몇일 후, 간디가 비를라 하우스(Birla House)에서 저녁 기도를 할 때였다. 갑자기 그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다치진 않았다. 간디도 무사했다. 하지만 간디를 암살하려 했던 마라띠 치트파얀 브라민(Marathi Chitpayan Brahmin) - 나뚜람 고드세(Nathuram Godse)라고 불렸음 - 은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디에게 보호를 받을 것을 권했지만, 간디는 모든 보호제공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방해받지않고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1948년 1월 30일 이른 저녁시간이었다. 간디는 그때 인도의 부총리 및 그의 친근 발라바이 파텔(Vallabhai Patel)을 만나 같이 기도를 하기로 했었다. 항상 5시 정각에 기도에 참석하던 간디는 이 날 따라 5시가 되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간디의 도티(힌두교 허리의상)의 주름에 매달려 그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시계는, 오늘 그가 늦었다는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간디의 죽음을 서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약간의 문학적 표현들이 있다. 유의하면서 읽었으면 한다. - 번역자 주).

간디는 항상 시간을 칼같이 지키던 사람이며, 이렇게 정각에 도착하지 못할 때면 항상 안절부절 했었다. 그리고 5시 10분이 되어 드디어 간디가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간디의 지팡이'로 불리던 아바(Abha)와 마누(Manu)에게 양쪽에서 두 어깨를 부축받으며 말이다. 간디는 기도가 열리기로 했던 정원 입구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그는 그의 손을 합장하여 관객들에게 나마스까라(Namascara)(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라는 힌디어)를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젊은 남자가 거칠게 그의 앞으로 와서 간디를 부축하던 마누(Manu)를 밀어냈다.
그 남자는 바로.. 전에 간디 집에 폭탄테러를 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던 바로 그 나뚜람 고드세(Nathuram Godse)였다. 그는 마누를 밀쳐낸 후 간디에게 복종의 자세를 취하는 듯 몸을 굽히더니 그의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으며 총알은 모두 간디의 가슴을 관통하였다. 간디의 하얀 숄은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간디는 마지막 순간까지 합장의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암살자를 축복하였다.. RAM! RAM! 을 외치며..

간디가 쓰러지고, 항상 그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시계 또한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시계바늘은.. 항상 그랬듯,, 5시 12분을 정확히 가르키며 멈추었다.(간디가 죽었다는 은유적 표현을 뜻한다 - 번역자 주)





(원문)
The last few months of Gandhi's life were to be spent mainly in the capital city of Delhi. There he divided his time between the 'Bhangi colony', where the sweepers and the lowest of the low stayed, and Birla House, the residence of one of the wealthiest men in India and one of the benefactors of Gandhi's ashrams. Hindu and Sikh refugees had streamed into the capital from what had become Pakistan, and there was much resentment, which easily translated into violence, against Muslims. It was partly in an attempt to put an end to the killings in Delhi, and more generally to the bloodshed following the partition, which may have taken the lives of as many as 1 million people, besides causing the dislocation of no fewer than 11 million, that Gandhi was to commence the last fast unto death of his life. The fast was terminated when representatives of all the communities signed a statement that they were prepared to live in "perfect amity", and that the lives, property, and faith of the Muslims would be safeguarded. A few days later, a bomb exploded in Birla House where Gandhi was holding his evening prayers, but it caused no injuries. However, his assassin, a Marathi Chitpavan Brahmin by the name of Nathuram Godse, was not so easily deterred. Gandhi, quite characteristically, refused additional security, and no one could defy his wish to be allowed to move around unhindered. In the early evening hours of 30 January 1948, Gandhi met with India's Deputy Prime Minister and his close associate in the freedom struggle, Vallabhai Patel, and then proceeded to his prayers.

That evening, as Gandhi's time-piece, which hung from one of the folds of his dhoti [loin-cloth], was to reveal to him, he was uncharacteristically late to his prayers, and he fretted about his inability to be punctual. At 10 minutes past 5 o'clock, with one hand each on the shoulders of Abha and Manu, who were known as his 'walking sticks', Gandhi commenced his walk towards the garden where the prayer meeting was held. As he was about to mount the steps of the podium, Gandhi folded his hands and greeted his audience with a namaskar; at that moment, a young man came up to him and roughly pushed aside Manu. Nathuram Godse bent down in the gesture of an obeisance, took a revolver out of his pocket, and shot Gandhi three times in his chest. Bloodstains appeared over Gandhi's white woolen shawl; his hands still folded in a greeting, Gandhi blessed his assassin: He Ram! He Ram!

As Gandhi fell, his faithful time-piece struck the ground, and the hands of the watch came to a standstill. They showed, as they had done before, the precise time: 5:12 P.M.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2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3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4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5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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