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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31일 토요일

마하트마 간디 4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그 후로 몇년간, 간디는 인도사회 재건설 작업에 온 몸을 바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인도가 독립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아메다바드(Ahmedabad)에 있는 그의 집(Sabarmati Ashram)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소금의 행진(3부 참조)에서 맹세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에는 그는 그의 원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운 거처와 마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바로 인도에서 '죽음의 심장' 이라고 불리는 세가온(Segaon) 지역. 그곳에는 전기도 없었고 물도 없었다. 오로지 어둠과 죽음많이 있을 뿐이었다.

간디가 이곳에 마을을 짓기 시작하자, 많은 정치가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간디와 미래 인도의 독립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 많은 유명인사가 찾아오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마가렛 생거 여사(미국에 출산정책을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간디는 또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를 요구하는 곳곳마다 찾아갔다.



간디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와중에 북부 국경지역에 가서 그의 열정적인 제자였던 파싼(Pathan) - 국경의 간디라고 불리우는 사람 - 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간디와 의회의 수뇌부는 파씨즘과 영국의 제국주의를 격하게 비난하면서 중립을 선언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의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의회장이었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는 이러한 간디의 의견에 반대를 하였다. 그리고 보스는 영국의 몰락이 당시 인도의 기회라고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보스는 의회장 재선을 놓고 간디와 접전을 벌여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생각은 바로, 간디가 여전히 국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간디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협조를 얻지 않는 이상 국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결국 보스는 사임장을 제출하게 되고, 의회장직에서 사임하자 마자 일본과 독일 나치주의자들의 협조자를 구하러 도망을 갔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1942년이 되고, 간디는 영국 법으로부터의 마지막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8월의 크란티 마이단(Kranti Maidan) 선언이다. 여기서 간디는 매우 감동적인 연설과 함께 모든 인도인들에게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그가 한 말이 바로 "실천하지 않을거면 죽어라.(Do or Die)" 라는 만트라(힌두교의 진언)이다.

같은 시기 간디는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떠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간디를 다시 체포하게 되고, 이로인해 인도 국회는 다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간디는 이 때 체포가 되어서 세계 2차대전이 끝날 때 까지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몇 달 후, 간디와 카스투르바(Kasturba)는 푸네(Pune)에 있는 아가 칸 왕궁(Aga Khan's Palace)에 구금되게 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카스투르바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것은 간디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카스투르바가 죽기 바로 전, 그의 유능하고 충실했던 비서 마하데브 데자이(Mahadev Desai)도 죽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두 사람을 잃은 간디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무슬림 연맹이 창궐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무슬림 일부 이익단체가 만든 것이었는데, 매우 영국에 협조적인 단체였으며, 심지어 그들의 전쟁을 돕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영국에 정권이 바뀌고 인도 독립에 긍정적이었던 Clement Atlee 휘하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독립은 급속하게 진행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진지한 협상도 같이 진행이 된다. 여기서 간디는 인도의 정치인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래서 그 협상들에 최대한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인도의 분할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였다.(당시 영국이 내세운 조건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할독립한다는 것이다. vivisection은 생체 해부를 뜻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묘사한 말 같다 - 번역자 주).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간디의 마지막 생애는 존경을 한다.).

또한 간디는 폭동으로 산산조각이 난 노아크할리(Noakhali) 지방의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들과 과부들을 돌봤다. 노아크할리 폭동이란 비하르에서 있었던 힌두교도들의 무슬림교도 살인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났던 무슬림교도들의 폭동을 말한다. 그리고 캘커타(Calcutta)지방에 가서 힌두와 무슬림의 국경분쟁을 조정하기 시작한다. 그의 노력으로 캘커타에서 일어나던 잔인한 전쟁은 막이 내리게 되고, 그 어떤 사람들도 간디의 이러한 '캘커타의 기적(Miracle of Calcutta)' 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드디어 독립을 한다. 그리고 간디는 그 때부터 네루(Nehru)지방에만 머물러 살았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를 인도 독립의 건설자이자 인도의 아버지라고 칭송하였다.


(원문)


For the next few years, Gandhi would be engaged mainly in the constructive reform of Indian society. He had vowed upon undertaking the salt march that he would not return to Sabarmati Ashram in Ahmedabad, where he had made his home, if India did not attain its independence, and in the mid-1930s he established himself in a remote village, in the dead center of India, by the name of Segaon [known as Sevagram]. It is to this obscure village, which was without electricity or running water, that India's political leaders made their way to engage in discussions with Gandhi about the futur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it is here that he received visitors such as Margaret Sanger, the well-known American proponent of birth-control. Gandhi also continued to travel throughout the country, taking him wherever his services were required.


One such visit was to the Northwest Frontier, where he had in the imposing Pathan, Khan Abdul Ghaffar Khan (known by the endearing term of "Frontier Gandhi", and at other times as Badshah [King] Khan), a fervent disciple. At the outset of World War II, Gandhi and the Congress leadership assumed a position of neutrality: while clearly critical of fascism, they could not find it in themselves to support British imperialism. Gandhi was opposed by Subhas Chandra Bose, who had served as President of the Congress, and who took to the view that Britain's moment of weakness was India's moment of opportunity. When Bose ran for President of the Congress against Gandhi's wishes and triumphed against Gandhi's own candidate, he found that Gandhi still exercised influence over the Congress Working Committee, and that it was near impossible to run the Congress if the cooperation of Gandhi and his followers could not be procured. Bose tendered his resignation, and shortly thereafter was to make a dramatic escape from India to find support among the Japanese and the Nazis for his plans to liberate India.


In 1942, Gandhi issued the last call for independence from British rule. On the grounds of what is now known as August Kranti Maidan, he delivered a stirring speech, asking every Indian to lay down their life, if necessary, in the cause of freedom. He gave them this mantra: "Do or Die"; at the same time, he asked the British to 'Quit India'. The response of the British government was to place Gandhi under arrest, and virtually the entire Congress leadership was to find itself behind bars, not to be released until after the conclusion of the war.


A few months after Gandhi and Kasturba had been placed in confinement in the Aga Khan's Palace in Pune, Kasturba passed away: this was a terrible blow to Gandhi, following closely on the heels of the death of his private secretary of many years, the gifted Mahadev Desai. In the period from 1942 to 1945, the Muslim League, which represented the interest of certain Muslims and by now advocated the creation of a separate homeland for Muslims, increasingly gained the attention of the British, and supported them in their war effort. The new government that came to power in Britain under Clement Atlee was committed to the independence of India, and negotiations for India's future began in earnest. Sensing that the political leaders were now craving for power, Gandhi largely distanced himself from the negotiations. He declared his opposition to the vivisection of India. It is generally conceded, even by his detractors, that the last years of his life were in some respects his finest. He walked from village to village in riot-torn Noakhali, where Hindus were being killed in retaliation for the killing of Muslims in Bihar, and nursed the wounded and consoled the widowed; and in Calcutta he came to constitute, in the famous words of the last viceroy, Mountbatten, a "one-man boundary force" between Hindus and Muslims. The ferocious fighting in Calcutta came to a halt, almost entirely on account of Gandhi's efforts, and even his critics were wont to speak of the Gandhi's 'miracle of Calcutta'. When the moment of freedom came, on 15 August 1947, Gandhi was nowhere to be seen in the capital, though Nehru and the entire Constituent Assembly were to salute him as the architect of Indian independence, as the 'father of the nation'.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2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마하트마 간디 3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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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애써)나아가다, 제안자, 열정적인, 시작/발발, 제국주의, 획득하다, 부드럽게하다/제출하다, 목숨을버리다, 구금, 죽다, ~에 바로 이어(following),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매우 진지하게, 갈망하다, 생체해부, 인정되다, 비방자, 훌륭함, 제국, 단독적인, 잔인한, ~로 인해

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마하트마 간디 3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투옥 생활 중, 간디의 몸은 많이 쇠약해졌다. 그래서 결국 1925년 석방이 된다. 그가 감옥에 있던 몇 년간 그는 힌두와 무슬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감옥생활 막바지였던 1924년, 그는 21일간의 단식 대 장정에 들어갔었다. 그 이유는 바로, 북서부 경계의 군사지역이었던 코하트(Kohat) 지방에서 힌두와 무슬림간의 폭동사태가 일어났던 것. 그 엄청난 단식은 그가 했던 많은 공개 단식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1932년이 되면서, 그는 Epic Fast라고 불리는 죽음의 단식에 돌입한다. 단식의 목적은 바로 '건드릴 수 없는 계층(Untouchable)' 이라고 불리고 억압받던 인도의 최하위 계층에게 독립된 선거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당시 힌두 사회에는 엄격한 계층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의 발전을 막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최하위 계층의 지도자가 간디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섯던 것. (아마 간디가 정치적인 인기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간디가 진심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디가 한 번도 힌두와 무슬림이 인도 사회의 두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논쟁에 대해 수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론들은 간디의 머리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던 걱정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꿋꿋이 사회 재정비를 하기 위해 건설적인 사회 프로그램들을 시작하게 된다. 간디는 위생과 건강에서부터 교육, 노동에 이르기까지, 사회 제반에 대해 몇 가지 건설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설립한 한 신문사를 통해 거침없이 그 생각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만약 간디에 대해 아무도 인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도 신문업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갔다는 것이다.



1930년 초반이 되자, 다시 민족 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당시 민족 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하던 인도 국립 의회(Indian National Congress)는 완전한 독립(Pruna Swaraj)이 곧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선언이 발표되고 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영국의 불합리한 법에 맞서 저항 운동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3월 2일, 간디는 Lord Irwin(영국에서는 상원의원을 Lord라고 불렀음 - 번역자 주)이라고 불리는 Viceroy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지금까지 영국이 많이 물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는 앞으로도 여전히 소금법에 대해 강력하게 맞설 것이라고 말을 한다. (당시 소금법은 영국이 인도인들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법안으로서, 인도인들로 하여금 모든 소금을 영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쓸 것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 번역자 주). 그의 편지에 많은 인도인들은 조금은 당황스러운 기쁨을 표했다. 그리고 간디는 바로 그 편지의 내용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1930년 3월 12일 이른 아침, 간디와 그의 무리들은 Dandi 지방의 해안가로 향한다. 그리고 4월 5일날 그곳에 도착하였다.(그때 당시 간디와 많은 사람들은 직접 걸어서 그곳까지 갔다 - 번역자 주). 간디는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소금을 제조하는 법을 가르치며 한 뭉치의 소금을 집어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수천만, 수억명(당시 인도 인구는 3억)의 사람들이 이 소금법에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불복종 운동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간디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 체포가 되었고, 다른 수백명의 사람들도 같이 체포가 되고 감옥에 구금이 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곧 해결되기 시작한다. 바로 영국 상원 Irwin이 간디와의 대화를 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 런던에서 인도의 독립 문제를 놓고 원탁 회의가 열리게 된다. (아마 영국인들이 많이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결국 1931년 간디는 영국으로 향하고, 그를 존경하는 몇몇 유럽인들을 만나서 힘을 쏟았지만, 인도 독립 문제 협상은 쉽게 끝나지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돌아오는 간디, 오자마자 다시 체포가 된다.


(원문)

Owing to his poor health, Gandhi was released from prison in 1925. Over the following years, he worked hard to preserve Hindu-Muslim relations, and in 1924 he observed, from his prison cell, a 21-day fast when Hindu-Muslim riots broke out at Kohat, a military barracks on the Northwest Frontier. This was to be of his many major public fasts, and in 1932 he was to commence the so-called Epic Fast unto death, since he thought of "separate electorates" for the oppressed class of what were then called untouchables (or Harijans in Gandhi's vocabulary, and dalits in today's language) as a retrograde measure meant to produce permanent divisions within Hindu society. Gandhi earned the hostility of Ambedkar, the leader of the untouchables, but few doubted that Gandhi was genuinely interested in removing the serious disabilities from which they suffered, just as no one doubt that Gandhi never accepted the argument that Hindus and Muslims constituted two separate elements in Indian society. These were some of the concerns most prominent in Gandhi's mind, but he was also to initiate a constructive programme for social reform. Gandhi had ideas -- mostly sound -- on every subject, from hygiene and nutrition to education and labor, and he relentlessly pursued his ideas in one of the many newspapers which he founded. Indeed, were Gandhi known for nothing else in India, he would still be remembered as one of the principal figures in the history of Indian journalism.


In early 1930, as the nationalist movement was revived,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the preeminent body of nationalist opinion, declared that it would now be satisfied with nothing short of complete independence (purna swaraj). Once the clarion call had been issued, it was perforce necessary to launch a movement of resistance against British rule. On March 2, Gandhi addressed a letter to the Viceroy, Lord Irwin, informing him that unless Indian demands were met, he would be compelled to break the "salt laws". Predictably, his letter was received with bewildered amusement, and accordingly Gandhi set off, on the early morning of March 12, with a small group of followers towards Dandi on the sea. They arrived there on April 5th: Gandhi picked up a small lump of natural salt, and so gave the signal to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to similarly defy the law, since the British exercised a monopoly on the production and sale of salt.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civil disobedience movement: Gandhi himself was arrested, and thousands of others were also hauled into jail. It is to break this deadlock that Irwin agreed to hold talks with Gandhi, and subsequently the British agreed to hold a Round Table Conference in London to negotiate the possible terms of Indian independence. Gandhi went to London in 1931 and met some of his admirers in Europe, but the negotiations proved inconclusive. On his return to India, he was once again arrested.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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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선거권(유권), 후퇴시키다, 구성하다, 거침없이, 아주/바로(그거), 명쾌한 종소리/대선언, 부득이하게/필연적으로, 강제로~하다/~할 수 밖에 없다, 어리둥절하게, 덩어리/뭉치, 잡아끌어 넣다, 막다른 골목, 결론이 나지 않는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주가 책정 원리를 알아보자

주가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떠한 기준으로 살펴봐야 하는가.

주가란 기본적으로 PER(Price Earning Ratio)를 기준으로 살펴봐야 하며

다음 글은 이러한 PER에 근거하여 주가를 어떻게 책정하고 판단해야 하는지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글이다.

좋은 글 같아서 소개해 드린다.

(*PER = 1주당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가격. 즉 회사의 순이익에 대해 주가가 몇 배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나 나타내는 수치이다)






‘영업이익의 140배’ 안랩 주가, 어떻게 봐야 하나






[영업이익과 시가총액]

뚜렷한 원인 없이 이익 대비 주가 한때 20배→140배
시장 평균은 10배 정도…신중한 검토로 낭패 피해야

위 그림은 최근 선거를 테마로 크게 움직이고 있는 안랩(옛 안철수연구소)의 주가 움직임이다. 안랩의 시가총액과 매출액, 그리고 영업이익을 같이 그린 것이다.

보통은 주가와 1주당 순이익을 비교해, 여기서 일정한 배수를 찾아낸 뒤 이를 기준으로 주가가 높다 또는 낮다고 말한다. 주가와 1주당 순이익에 총발행주식 수를 곱하면 바로 시가총액과 순이익이 나오므로 주가이익배수란 바로 시가총액과 순이익을 비교한 것이 된다. 여기서 순이익이 아니라 영업이익을 비교한 것은 영업이익이 회사의 영업실적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회사의 시가총액과 영업이익을 서로 비교해 보자. 이 둘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보통 영업이익의 몇 배에서 주가가 만들어지는지 짐작하기 위해서다.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2011년 여름까지만 해도 약 2000억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연말에는 놀랍게도 1조4000억원까지 뛰어, 주가가 6개월 사이에 7배나 올라버렸다. 그 뒤에는 다시 떨어지고 있는 중인데, 현재는 약 8000억원 근처까지 떨어졌다. 여전히 과거에 비해서는 4배나 높은 수준이다.

이 회사의 과거 시가총액과 영업이익의 관계를 보면, 좋게 말해도 영업이익의 10~20배 사이에서 시가총액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회사가 갑자기 이익의 140배 수준으로 주가가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최근 2달 사이에 주가가 50% 떨어졌다.

주가가 이렇게 급등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실체에 무슨 변화가 있어 앞으로 이 회사의 영업실적이 매우 좋아질 만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회사의 영업환경이나 회사의 실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자, 이제 이 회사의 시가총액이 약 1조4000억원이었을 때 이 주식을 산 사람의 입장에서 회사의 장래를 짐작해 보기로 하자. 이때 주식을 산 사람은 여기서 일정 정도 투자수익을 기대하고 주식을 샀을 것이다. 5년 뒤에 이 회사의 주식이 2배로 올라간다고 보자. 그러면 연간으로 약 15% 주식이 올라간 것이다. 그래서 이때 시가총액이 2조8000억원이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당시 이 회사의 주가이익배수가 약 15배라고 가정하자. 과거 한국 주식시장의 평균 주가이익배수는 대략 10~15배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당시 이 회사의 순이익은 1870억원이 되어야 한다. 지금 영업이익이 약 100억원이므로 이 회사는 앞으로 5년간 매년 영업이익이 약 80%씩 늘어나야 5년 뒤에 1870억원이 된다.

만약 어떤 투자가가 이런 예상을 하고 이때 이 주식을 샀다면 그 뒤 이 회사의 주식이 어떤 이유로 50% 떨어졌다 해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곧 영업실적이 크게 늘어나서 주가가 5년 뒤에는 다시 높이 올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짐작 없이 그냥 올라가는 시세를 보고 이 회사 주식에 뛰어들었다면 지금쯤은 큰 낭패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회사의 가치를 보고 주식에 투자를 한 것이 아니다. 마치 문방구에서 아이들 장난감 돈놀이처럼 종이 위에 찍힌 숫자 돈을 보고 돈놀이 장난을 한 것이다. 아이들만 장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장난을 한다. 자기보다 더 바보가 있어서 자기가 산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주고 이 종이돈을 살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바보놀이를 한 것이다.

과연 주식의 가격은 어떻게 매겨지는 것일까? 정말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물음을 달리 해보자. 회사란 과연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구나 쉽게 할 것이다. 그렇다. 모든 회사는 값어치를 가진다. 그럼 그런 회사에 대해 얼마의 값어치를 매겨야 할까?

값을 매기는 것은 고스톱과 비슷하다. 고스톱에서도 1점에 얼마라고 값을 매긴다. 처음에는 1000원이라고 시작하지만 열을 받으면 1만원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주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가 만들어내는 1원의 이익에 대해 주가로 얼마를 매길지 정하면 된다. 그러나 고스톱과 주식은 다르다. 즉, 고스톱은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하고 값을 매긴다. 그러나 주식에서는 이런 약속이 없다. 이 회사가 만들어내는 1원의 이익에 얼마의 값을 매길 것인지 서로 약속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그 회사가 만들어내는 1원의 이익에 대해 주가를 매기는 값어치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수준은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시장의 평균 가격이라고 한다. 지금 시장에서 이 평균 가격은 약 10원이다. 즉 주가이익배수는 약 10배라는 말이다.

물론 어떤 회사의 장래가 밝아 보이면 이 배수는 올라간다. 20배일 수도 있고, 30배일 수도 있다. 또는 장래가 어두워 보이면 5배로 떨어지기도 한다. 어떤 회사의 미래를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활발하게 거래가 일어난다. 그러나 20배 수준이던 회사가 갑자기 140배로 올라가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장난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장난은 장난으로 끝나야 한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 낭패다.


Copyright : 한겨례, 2012.3.19.

지난 2000년간 전세계 GDP 비중 변화




놀라운 그림이다. 역시 중세 이전에는 황하문명, 인더스 문명의 후손인 중국과 인도가 월등히 세계를 지배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래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짚어보자면

1. 미국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라는 사실.
2. 중국과 인도의 놀라운 성장
3. 일본과 러시아의 급격한 추락

정도가 되겠다.

그래프 작성자가 이 자료를 어떻게 모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1인당 GDP도 이렇게 그릴 수 있는지 궁금하다.


마하트마 간디 2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Copyright: Vithalbhai Jhaveri

 간디가 인도에 오고 1년간 그는 한 번도 법정에서 승리한 적이 없는 무능력한 변호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다 압둘라(Dada Abdulla)라는 한 인도 상인으로부터 간디에게 법률 자문을 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것은 간디에게 매우 긴 시간동안 남아공에 거주할 것을 요구하는 의뢰였고, 간디는 20년동안 그 곳에 살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남아공에는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곳에 거주하던 인도인들은 상당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상태였다. 그들은 정치적 권리도 없었고, 백인들로부터 'Coolies'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간디는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당시 남아공에서 인도인 얼마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는, 다음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날 간디는 피터메리쯔버그에서 1등석 티켓을 타고 우아하게 앉아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승무원들이 몰아닥치면서 그는 하등칸으로 쫓겨나게 된다. (의역)


이 사건으로 인해, 드디어 간디는 정치적인 시각을 트이게 되고, 위대한 인도의 지도자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비폭력, 비저항주의'라는 뜻의 'Satyagraha'라는 개념을 주창하게 된다. 간디는 자기 자신을 Satya(진실), 그리고 오로지 Satya랑만 결합될 수 있는 Ahimsa(비폭력, 사랑), 마지막으로 Brahmacharya(신에 대한 강한 신념)에 대한 독실한 신자라고 줄곧 설명하곤 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이러한 Satyagrapha에 대해 연마하는 과정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추구한 목적은 '억압자와 억압받는자 모두 그들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과 '자유는 그것이 억압받지 않을 때 진정한 자유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남아공 거주 인도인들에게 인두세(人頭稅)를 매기고 있었고, 기독교 방식이 아닌 인도인의 결혼은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래서 간디는 그의 저서인 'Satyagrapha in South Africa'에서 인도인들이 그들의 억압받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1909년이 되던 어느 날, 간디는 다시 이 모든 여정을 뒤로 한 채 인도로 잠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Hind Swaraj or Indian Home Rule' 이라는 짧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 논문을 필두로 산업화와 근대화의 모든 측면에 대한 비평을 하기 시작한다.



간디는 1915년에 남아공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인도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1931년에 잠깐 유럽에 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인도 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아무도 간디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간디는 꿋꿋하게 그의 정치적 스승인 고크할레(Gokhale)의 조언을 받으며 공부를 했고, 그가 공부한 내용을 당시 인도의 상황에 적용하려 노력하였다.

그 후 간디는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지역 항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비하르(Bihar) 지방에서 있었던 Champaran 항쟁이다. 그것은 당시 비하르 인디고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강압적인 노동 환경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 아메다바드(Ahmedabad)의 직물 제조공장에서 노동자와 관리자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운동을 꼽을 수 있다.

이렇게 간디는 전국 방방곳곳의 지역 항쟁에 참여를 하면서,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이렇듯 민족주의 정치의 방향을 재빠르고 강력하게 지휘해 나가던 모습은, 그가 1919년, Rowlatt 법이라는 강압적인 법에 대항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리고 간디는 그 시점을 전후로 인도의 유명한 작가였던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로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 호칭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펀잡(Punjab) 지방에서 소동이 발생하게 되고, 이로인해 많은 비무장상태였던 인도인들이 잔인하게 대량학살된다. 이에 분노한 간디는 펀잡국회조사위원회(Punjab Congress Inquiry Committee)에 관한 보고서를 쓰게 된다.


그 후로 2년간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벌이게 된다. 비협조 운동이란 인도인들로 하여금 영국 법인과 관련된 모든 것에 협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영국인에게 빼앗긴 명예를 되찾고, 자기 의존(독립)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비협조 운동이 확산되면서 영국 정부가 거의 인도에서 무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비협조 운동은 1922년 2월, 작은 시장도시였던 차우리 차우라에서 많은 인도 경찰관들이 영국인들로부터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중단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간디는 바로 체포가 되었으며, 폭동 선동죄라는 죄명을 부여받고 6년간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6년 후 최종 재판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영국의 비합리적인 법에 대해 건방진 말투로 고발을 하였다. 



(원문)



After one year of a none too successful law practice, Gandhi decided to accept an offer from an Indian businessman in South Africa, Dada Abdulla, to join him as a legal adviser. Unbeknown to him, this was to become an exceedingly lengthy stay, and altogether Gandhi was to stay in South Africa for over twenty years. The Indians who had been living in South Africa were without political rights, and were generally known by the derogatory name of 'coolies'. Gandhi himself came to an awareness of the frightening force and fury of European racism, and how far Indians were from being considered full human beings, when he when thrown out of a first-class railway compartment car,
though he held a first-class ticket, at Pietermaritzburg. From this political awakening Gandhi was to emerge as the leader of the Indian community, and it is in South Africa that he first coined the term satyagraha to signify his theory and practice of non-violent resistance. Gandhi was to describe himself preeminently as a votary or seeker of satya (truth), which could not be attained other than through ahimsa (non-violence, love) and brahmacharya (celibacy, striving towards God). Gandhi conceived of his own life as a series of experiments to forge the use of satyagraha in such a manner as to make the oppressor and the oppressed alike recognize their common bonding and humanity: as
he recognized, freedom is only freedom when it is indivisible. In his book Satyagraha in South Africa he was to detail the struggles of the Indians to claim their rights, and their resistance to oppressive legislation and executive measures, such as the imposition of a poll tax on them, or the declaration by the government that all non-Christian marriages were to be construed as invalid. In 1909, on a trip back to India, Gandhi authored a short treatise entitled Hind Swaraj or Indian Home Rule, where he all but initiated the critique, not only of industrial civilization, but of modernity in all its aspects.


Gandhi returned to India in early 1915, and was never to leave the country again except for a short trip that took him to Europe in 1931. Though he was not completely unknown in India, Gandhi followed the advice of his political mentor, Gokhale, and took it upon himself to acquire a familiarity with Indian conditions. He traveled widely for one year. Over the next few years, he was to become involved in numerous local struggles, such as at Champaran in Bihar, where workers on indigo plantations complained of oppressive working conditions, and at Ahmedabad, where a dispute had broken out between management and workers at textile mills. His interventions earned Gandhi a considerable reputation, and his rapid ascendancy to the helm of nationalist politics is signified by his leadership of the opposition to repressive legislation (known as the "Rowlatt Acts") in 1919. His saintliness was not uncommon, except in someone like him who immersed
himself in politics, and by this time he had earned from no less a person than Rabindranath Tagore, India's most well-known writer, the title of Mahatma, or 'Great Soul'. When 'disturbances' broke out in the Punjab, leading to the massacre of a large crowd of unarmed Indians at the Jallianwala Bagh in Amritsar and other atrocities, Gandhi wrote the report of the Punjab Congress Inquiry Committee. Over the next two years, Gandhi initiated the non-cooperation movement, which called upon Indians to withdraw from British institutions, to return honors conferred by the British, and to learn the art of
self-reliance; though the British administration was at places paralyzed, the movement was suspended in February 1922 when a score of Indian policemen were brutally killed by a large crowd at Chauri Chaura, a small market town in the United Provinces. Gandhi himself was arrested shortly thereafter, tried on charges of sedition, and sentenced to imprisonment for six years. At The Great Trial, as it is known to his biographers, Gandhi delivered a masterful indictment of British rule.


Copyright :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관련 시리즈 보기>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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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모르는 사이에, 경멸적인, 얼마나, 칸막이, 신조어를 만들다(주조하다), 의미하다, 강력하게, 독실신자, 이해하다/마음에품다, (사상등을)연마하다, 둘다 같은(A and B alike), 인두세, 논문, 우월함, (항해)키를 잡다, 덕망, 빠뜨리다, 바로 그 사람 누구누구, 폭동/소요사태, 조사/심리, ~~에의해 수여된, 마비되다, 중단되다, 그 후, 폭동 선동, 건방진, 기소/고발

마하트마 간디 1 (Mahatma Gandhi)(영어 + 번역)




Copyright: Vithalbhai
Jhaveri/ GandhiServe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뽀르반데르(Porbander) - 현재의 구자라트(Gujarat) 지방 - 의 한 작은 마을에서 1869년 10월 2일에 태어났다. 간디가 어릴적, 그는 아버지가 지역 장관 고문을 하고 있던 라즈콧(Rajkot) 근처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 때 당시 인도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500개 정도의 영역과 공국, 주 들은 국내적 일에 관련하여 자치가 허용되었었다. 이 들 주는 'Native States'라고 불리는데, 간디의 아버지가 일하던 라즈콧(Rajkot) 지방도 그 중에 하나였다.






 간디는 나중에 늙어서 그의 어릴적 시절에 대하여 '진실에 대한 시험(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에 기록하였다. 간디의 아버지는 간디가 학교를 마치기 전에 죽었으며, 그후 간디가 13살이 되던 해 동갑의 카스투르바(Kasturba)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1888년 어느 날, 간디는 영국에 가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떠난다. 간디의 모든 집안 어른들은 그것을 말렸지만, 정작 그 자신의 결심은 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간디는 술, 여자, 고기를 가끔씩 먹고 즐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그의 어머니는 간디에게 영국에 가 있는 동안 절대 와인과 여자, 고기를 접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그리고 간디가 인도를 떠날 때, 그에게는 몇 살 안된 아들 하리랄(Harilal)이 있던 상태였다.



런던에서 간디는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신을 봤다고 주장하는 견신론자, 채식주의자, 그리고 당시 영국의 산업 혁명 바람으로 인해 계몽이 되고 있던 다른 모든 계몽된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영국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한다고 간디에게 소개하였다. 간디는 힌두교의 정통 신자였지만, 이 모든 사람들에게 감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런던에서 그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게 소개되어 찾아가서 결의에 차서 목적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이 문장이 조금 이해가 안됨).

이 모든 사건을 뒤로하고, 간디는 마침내 1891년, Inner Temple에서 변호사 시험에 붙게 된다. 그는 변호사 합격 후 영국 런던 고등법원에서 잠깐 일했다. 하지만, 결국 그 해를 못넘기고 인도로 돌아오게 된다.(다큐멘터리에 의하면, 간디가 그때 소심한 성격 탓에, 첫 법정에서 패배를 맞보고 실의에 가득 찼다고 전해짐.)






(원문)
Mohandas Karamchand Gandhi was born in the town of Porbander in the state of what is now Gujarat on 2 October 1869. He had his schooling in nearby Rajkot, where his father served as the adviser or prime minister to the local ruler. Though India was then under British rule, over 500 kingdoms, principalities, and states were allowed autonomy in domestic and internal affairs: these were the so-called 'native states'. Rajkot was one such state.




Gandhi later recorded the early years of his life in his extraordinary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with Truth. His father died before Gandhi could finish his schooling, and at thirteen he was married to Kasturba [or Kasturbai], who was of the same age as Mohandas himself . In 1888 Gandhi set sail for England, where he had decided to pursue a degree in law. Though his elders objected, Gandhi could not be prevented from leaving; and it is said that his mother, a devout woman, made him promise that he would keep away from wine, women, and meat during his stay abroad. Gandhi left behind his son Harilal, then a few months old.

In London, Gandhi encountered theosophists, vegetarians, and others who were disenchanted not only with industrialism, but with the legacy of Enlightenment thought. They themselves represented the fringe elements of English society. Gandhi was powerfully attracted to them, as he was to the texts of the major religious traditions; and ironically it is in London that he was introduced to the Bhagavad Gita. Here, too, Gandhi showed determination and single-minded pursuit of his purpose, and accomplished his objective of finishing his degree from the Inner Temple. He was called to the bar in 1891, and even enrolled in the High Court of London; but later that year he left for India.


Copyright, Vinay Lal, 2001, 2012

번역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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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국, 자치, 독실한, 견신론자, 계몽된, 변두리의

인도를 알기 위해서는 간디부터 알아야 한다.

현재 인도에 4개월째 거주중이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인도인의 정서, 생활,, 그들의 문화, 교류..에 대해서 서서히 느껴가고 있다.

그러던 와중 문득 간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현듯 번개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도를 알고 느끼기 위해서는 간디를 알아야 한다."
"You should learn Gandhi first to see and feel the India!"

실제 인도에 대해 모르고 간디를 접하는 것과

인도를 경험하고 느끼는 와중에 간디를 접하는 것은

커다란 영감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재 인도인의 정서와 문화, 생활 속 모든 것에

간디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인도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간디에 대해 파헤쳐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떠한 위인이었으며, 어떠한 지도자였고, 어떠한 개인이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해 볼 것이다.

그리고 간디를 알고 인도를 보는 느낌은, 지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